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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나다운 게 뭔데

[자아] - 1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거시적인 흐름 중 하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는 명령이다. 이 정언명령에 따르면 현재는 미래를 위한 제물이다. 그 미래 역시 더 먼 미래를 위한 디딤돌이다. 이러한 인식은 무한하게 뒤로 확장한다. 초중고 시절은 명문대 입학을 위해, 명문대 입학은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안정적인 직장은 가정을 일구기 위해 존재하는 식이다.


앞서 언급한 한국식 인생 루트를 관통하는 건 실은 돈이다. 너의 인생을 위해서, 잘 살기 위해서 등 다양한 문구로 포장하긴 하지만 사실 한국인의 삶이란 거칠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한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방식은 그러하다.


어린 시절의 추억, 대학에서의 진리 탐구, 일에서의 자아실현은 대개 ‘현실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는 철없는’ 소리로 취급받는다. 대신 1분 1초를 어떻게든 경제적으로 번역하고자 하는 노력은 박수를 받는다. 사회 전체가 돈을 뽑아내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 같다.


삶을 어떠한 목적이 있는 대상으로 다루는 건 대상화의 일종이다. 대상화란 정신적 자아를 가진 존재에 목적성을 부여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람은 일을 하기 위해, 또는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자진해서 자신을 대상화한다. 과정보다는 결과가,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귀중한 가치를 갖는다.


문제는 미래를 향한 인식 확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한계점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언젠가 불가역적인 소멸의 순간을 맞이한다. 죽음의 시점은 그 누구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사후세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 현생에서의 삶은 딱 한 번뿐이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와 “카르페 디엠(오늘을 살아라.)”은 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어느 순간에는 죽음을 맞이할 테니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좋다. 그럼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 보자. 이런 다짐과 함께 ‘퇴사 후 세계여행’이나 ‘욜로족’ 같은 형태의 삶이 등장한다. 딱 받은 만큼만 일하며 자기 삶을 챙기겠다는 ‘조용한 퇴사’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반대급부의 라이프스타일도 맹위를 떨친다. 재테크, 사업, N잡, 각종 부업 등을 통해 어떻게든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겠다는 몸부림이 대표적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돈 버는 공부를 하고, 잠을 줄이고, 자기계발서를 달달 외운다. 이러한 삶 역시 ‘내 인생을 누리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시점이 미래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두 형태의 삶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내 삶’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디에 있는 걸까? 세계여행을 떠나기 위해 배낭을 꾸리는 여행자는 ‘내 삶’이 지금 이곳이 아니라 해외의 여행지, 혹은 그 여정에 있다고 믿는다. 돈을 벌기 위해 독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각종 재화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경제적 안정성이 ‘내 삶’이라고 여긴다.


조금 이상하다. ‘내 삶’과 ‘지금의 나’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는 나는 부정해야 마땅한 존재로 전락한다. 나답게 살겠다며 무언가를 추구하는데, 그 나다움이 ‘나’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움’이 가진 폭력성이 자아를 강하게 짓누른다. 이는 이국적인 여행지를 떠돌아다녀야, 또는 막대한 부를 거머쥐어야 나다울 수 있는 말과 같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다워야 한다’는 담론이 무한정하게 생산된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는 주석도 붙는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나다울 수 있는지, 어떻게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성숙한 논의는 부족해 보인다. 아직 내가 어떤 존재인지조차 모르는데 뒤에서 나답게 살라며 등을 떠미는 모양새다. 누구나 얘기할 수 있는 모호한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만 쏟아진다. 사유는 없고 주장만 있다.


한 존재를 정의한다는 건, 그 존재가 점유하고 있는 영역을 더듬는 행위와도 같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처음부터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고 애쓰기보단, 어디까지가 나인지를 살펴야 한다. 어디까지가 나인지를 알려면 반대로 나를 이루는 요소를 하나씩 들어내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부분이 드러난다. 그 부분이 곧 ‘나’는 아니다. 다만 무엇이 ‘나’인지, 또 ‘나다운 게’ 뭔지를 찾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너무 많은 정보, 혹은 욕구에 시달리는 건 나를 찾는 여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다워야 한다는 명제에 잡아먹히면 오히려 나다울 수 없다. 차라리 차분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게 낫다.


돈이든 자아 성찰이든 세계여행이든 뭐든 간에 자신의 힘으로 사유해야 한다. 주장은 이미 넘쳐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중 유의미한 사유를 거친 주장은 드물다. 누군가가 만들어 내지 못했다면, 스스로 해야 한다. 세상만사에 대해 전부 성찰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내게 중요한 게 뭔지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주장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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