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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블루, 블루, 블루

[자아] - 2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조사에 따르면 20대 우울증 환자 수는 2017년에 비해 2021년 120% 이상 증가했다. 이는 전 연령대를 통틀어 가장 높은 증가율이다. 같은 기간 30대는 67.3%, 10대도 90.2% 증가했다. 다른 세대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다. 즉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우울증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여러 미디어 매체를 통해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다만 이 같은 문제가 특정 세대를 중심으로 나타난다면 어떨까? 요즘 들어 유독 젊은 세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닐까?


혹자는 코로나 블루나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물론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적 활동반경이 축소되고,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진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 세대에만 국한된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2010년도에 ‘N포세대’라는 말이 처음 등장했다. 연애, 결혼, 출산, 취업 등의 여러 과업 앞에서 백기를 드는 세대를 의미한다.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웬만하면 취업해서, 결혼해서, 출산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 자식 세대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언제 결혼하니, 언제 손주 안겨줄 거니, 하는 식으로.


젊은 세대는 미칠 노릇이다.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결혼 적령기니 뭐니 하는 강압적인 기준을 들이대며 압박을 해댄다. 아예 비혼주의를 선언하거나, 차일피일 결혼 일자를 미룬다. 부모 세대도 속이 타들어 간다.


하지만 솔직해지자. 속이 타들어 가는 이유가 정녕 자식의 미래를 걱정해서일까? ‘남 부끄러워서 내가 어떻게 사냐’느니, ‘누구네 집 딸내미는 벌써 애가 둘이라더라’하는 식의 발언에서 자녀 세대에 대한 배려나 존중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사회가 정한 규범에 맹목적으로 순응하기 위해 나타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불안장애도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불안감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지리란 판단이 서질 않을 때 주로 나타난다. 여기에 ‘언젠가는 괜찮은 미래가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마저 좌절되면 깊은 절망감이 내면에 자리하게 된다.


젊은 세대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다. 따라서 불안정한 미래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장래가 그리 밝지 않음을, 그리고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재조차 자신의 편이 아님을 직감한 것일까. 그 직감이 마음의 병으로 새어 나오는 걸까.


현실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면 사람은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선택을 내린다. 누군가는 미래에 찾아올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희생한다. 파이어족이 가장 대표적이다. 파이어족은 극도로 소비를 아껴 빠르게 은퇴를 한 뒤, 원하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려는 집단이다. 은퇴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처를 모색하고, 허리띠를 강하게 졸라맨다.


반대로 현재의 즐거움을 한껏 누리자는 이들도 등장했다. 욜로(YOLO)족이 대표적이다. 어차피 미래에도 얻을 이익이 크지 않으니 당장 가지고 있는 얼마간의 자산이라도 확실한 행복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다. 극단화된 삶의 형태가 나타난다는 건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럽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국가 단위의 거대 담론은 붕괴하였다. 민주화와 경제발전이라는 오랜 숙원사업이 이루어진 데다, 다양한 삶의 가치가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곗바늘을 뒤로 돌려보면 특정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국가를 지배했다.


조선에서는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가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중세 유럽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왕권이 거대한 힘을 휘둘렀다. 그러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본격적인 현대사회의 포문을 열었다. 거대 담론은 무너졌다. 이제 개인은 저마다의 가치를 추구할 권리를 얻었다.


역설적으로 여기서 문제가 나온다. 기존의 거대 담론은 비록 강압적이었지만 최소한 얼마간의 보상을 약속했다. 더 나은 세상이라든지, 당장의 안위라든지 하는 식으로. 평생직장이 살아있던 시절,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종신고용을 보장했던 것처럼.


이제 남은 건 거대 담론의 잔해에 찌꺼기처럼 눌어붙은 여러 의무 조항과 불안한 미래뿐이다. 회사에 충성해도, 종교를 신봉해도, 국가에 대한 애정을 과시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현대 한국 사회에서 ‘난 그냥 개인이오’ 같은 말을 하며 ‘나 자신’으로 살겠다는 선언을 해봐야 온전히 존중받기도 어렵다.


그래서 제도권에서 탈출하거나, 제도권의 꼭대기에 오르거나, 혹은 그 모든 시도를 포기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우울증은 그 뿌리 깊은 절망감에서 기인한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어설프게 병존하고 있는 틈새에 끼어 신음만 내는 것이다.


사실 우울증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에 쏟아지는 부정적인 시선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이 있다. 내면의 면역체계가 약해지면 나타나는 증상일 따름이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왜 이렇게 나약하냐고 윽박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우울증만은 의지만으로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한 의지만 있다고 해서 바이러스를 몸에서 몰아낼 수 없듯, 우울증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상담과 휴식, 약물치료와 운동 등의 방법을 통해 치유해야 한다. 우울증에 대한 담론을 억누른 결과,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보인다.


혹자는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부르며 문제를 단순화한다. 어떤 이들은 ‘누가 자살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냐’고 빈정거린다. 네가 그렇게 선택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과 결과는 네가 온전히 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사회는 면죄부를 얻는다.


자살이 사회적 ‘살인’이라는 말에 완전히 공감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가 책임을 온전히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 개인이 자살을 택하기까지 생각보다 많은 단계를 거친다. 그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 또한 사회다. 우울증에 대한 공론화를 금기시하는 분위기, 공권력의 책임 방기로 발생하는 여러 사건·사고들, 정신적 문제에 대한 지원과 대책 부재, 경제적 양극화 등이 대표적이다.


이젠 정말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최소한 누군가의 어려움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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