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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인스타그래머블

[자아] - 3

‘Instagramable(Instagram+able). 직역하면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이라는 뜻이다. 인스타그램은 사진 및 영상 기반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으로 2030 세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은 메타(구 페이스북)와의 합병 이후 계속 판세를 키웠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페이스북을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과 영상은 문자보다 더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특히 영상은 청각 정보와 함께 생생한 현장감을 그대로 옮겨온다. 여기에 사회적 관계 욕구가 더해지자,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 미디어 서비스는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얼마 전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 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여러 촬영 각도로 트리의 모습, 무엇보다 자기 모습을 담기 위해서. 그렇게 찍은 수십장의 사진 중 가장 잘 나온 녀석을 고른다. 그 위에 여러 필터를 덧씌운다. 간결한 해시태그와 함께 올리면 트리는 제 역할을 다한 셈이다. 적어도 거기 모인 이들에게 크리스마스트리란 ‘Instagramable’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정보가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정보는 크게 세 가지다. 경험 정보, 관계 정보, 그리고 자아 정보다.


경험 정보는 인스타그램 피드나 스토리를 통해 올리는 사진과 영상을 통해 충실히 구현된다. 예쁜 크리스마스트리, 반짝거리는 스트링 라이트, 사방에 울려 퍼지는 캐럴,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을 무심한 듯 바라보고 있는 나의 모습. 이 모든 걸 한 화면에 조심스레 담아 시청각적인 자극을 빚어낸다. 여기서 전달되는 신호는 ‘나 이런 것도 경험했어’다.


관계 정보는 팔로워나 친구 수를 통해 정량화되기도 하고, 사진에 같이 찍힌 사람을 통해 정성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팔로워 백 명을 가진 사람보다 만 명을 가진 사람의 관계 정보가 더 가치 있다. 프레임 속에 들어온 사람이 많을수록, 잘생기고 예쁠수록, 쉽게 만나기 어려울수록 더 가치 있다. ‘남친 혹은 여친이 찍어준’이라던가, ‘00모임에서 같이 찍은’이라는 키워드가 붙으면 큰 가치를 갖는다. 여기서 전달되는 신호는 ‘나 이런 관계망을 가지고 있어’다.


자아 정보는 더 은밀하게 나타난다. 대놓고 “나는 환경과 아동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은 없다. 진정성도 없어 보이고 주장만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생물다양성 영화시사회에 참석한 영상을 올리거나, 아동 인권 단체에 기부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공유한다면 이런 메시지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


특히 소유를 위한 소비에서 경험을 위한 소비로 트렌드가 옮겨 가며 자아 정보는 더 큰 가치를 갖는다. 예전처럼 외제 차 로고와 고급 시계를 대놓고 촬영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보다는 더욱 아주 멋지고 윤리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경험 소비가 더 주목받는다. 여기서 전달되는 신호는 ‘나 이런 사람이야’다.


소셜 미디어라는 트로피 방에 전시될 수 있는 건 조금이라도 독특한 경험이거나, 넓은 관계망이거나, 멋진 나의 자아상이다. 결국 중요한 건 신호와 정보다. 신호와 정보는 보는 이의 마음에 인식을 심어준다. 나라는 사람을 긍정적으로 편집한 결과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상호호혜적이다. 흔히 말하는 ‘좋아요 품앗이’가 대표적이다. 나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면, 나도 너의 사진에 ‘좋아요’를 눌러주겠다는 식이다.


혹자는 SNS가 ‘시간 낭비 서비스’의 준말이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이런 납작한 평가로는 소셜 미디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확실한 건 소셜 미디어가 대중의 삶에, 특히 젊은 세대의 일상에 꽤 강렬히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욕구가 있다. 설령 그것이 악명이라고 할지라도. 비틀스의 멤버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은 ‘유명해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하물며 명예를 얻고 싶은 욕망은 오죽하겠는가. 소셜 미디어는 기존에 공인만 누리던 스포트라이트를 모두에게 비춘다. 이제 일반 대중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자기표현의 욕구가 강한 젊은 세대가 크게 열광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통로가 꽤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부를 가지고 있다면 비싼 자동차나 명품 가방을 통해, 명성을 얻고 있다면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팬을 통해 자기표현이 가능하다. 둘 다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는 소셜 미디어라는 대안이 생겼다. 계정을 열어 남들이 환호할 만한 사진과 영상을 찍어서 올리면 된다.


온라인 트로피룸이 주목받으니, 오프라인에서의 경험도 그 의미가 달라진다. 기존에는 ‘내가 하는 그 경험’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그 경험을 하는 나의 모습’이 중하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자신을 전시할 수 있으니까.

이제 콘서트장에 가면 많은 이들이 자신의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를 통해 가수의 공연을 관람한다. 바로 눈앞에 있는 실제 가수보다 그 장면이 제대로 화면에 담기고 있는지가 더 우선시된다. 공유되지 못할 경험이란 소셜 미디어에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인스타 맛집’도 마찬가지다. 맛보다는 가게 인테리어나 음식이 주는 시각 정보에 더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형형색색의 소스를 활용하거나, 치즈를 마구 끼얹거나, 햄버거 패티로 탑을 쌓는 식이다. 즉 실제 맛보다는 맛있어 ‘보이는 게’ 더 중요하다. 여기에 지글지글 뭔가를 튀기거나 굽는 소리가 들린다면 금상첨화다. 청각 정보는 꽤 강력한 신호니까.


사실 이조차도 어느 정도 사회적 부를 가지고 있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다. 온라인 공간을 풍성하게 채워가려면 역설적으로 오프라인에서의 영향력이 있어야 한다. 소셜 미디어란 오프라인에 있던 존재(It)를 온라인 정보(Bit)로 변환하는 도구다. 그래서 ‘인스타 맛집’에 갈 자유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온라인 콘텐츠의 충실한 소비자가 된다.


다큐멘터리 <소셜 딜레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종사했던 이들의 입을 빌려 그 폐해를 고발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활성화된 이후 여러 부작용이 나타난다. 젊은 세대의 우울증 비율이 늘었고, 정치적 의견은 양극화되었고, 심지어 자살률도 증가했다.


경험의 내용보다는 형식이, 숙고보다는 선동이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플랫폼 기업의 경영진은 자기 자녀에게는 소셜 미디어나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게 한다. 그 해악을 최전선에서 경험하고 있으니까.


이 시점에서 ‘진짜 삶은 현실에 있다’든지, ‘소셜 미디어는 해롭다’라든지 하는 식의 조언이 나온다. 물론 일리가 있다. 다만 오프라인 공간을 제대로 점유하지 못하는 청년 세대가 온라인 공간에서나마 숨을 돌리고 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게다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전 세계에 있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니 소셜 미디어를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온라인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충고하기 이전에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설령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더라도 맘 편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과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진짜 삶’이 현실에 있다면 그 현실을 풍성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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