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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비혼주의를 굳이 선언하라

[관계] - 2

침팬지나 고릴라 등 영장류 무리를 잘 살펴보면 소수의 알파 메일(Alpha male; 우두머리 수컷)만이 대부분의 암컷과 짝짓기를 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다.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대부분의 베타 메일(Beta male)은 그저 암컷 주변을 서성거릴 뿐, 평생을 독실한 싱글로 살아야 한다. 꼭 무리 생활을 하는 영장류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연계에서 자기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수컷은 생각보다 소수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일처제는 다수의 남성을 구원하는 메시아에 가깝다. 만약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로 태어났다면 평생 여성 근처에라도 갈 확률이 현저하게 떨어졌을 터이다. 그래서 이 혁신적 제도에 깊이 감사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기껏 배려해서 결혼제도를 만들어놨더니 이를 아예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무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두 명이 그랬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텐데 그 확장세가 심상치 않다. 세상은 이들을 비혼주의자라고 부른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 짝이 없는 명칭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다니. 오이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비오이주의자’라거나,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다고 해서 ‘비해외여행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더구나 ‘00주의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특정한 신념 체계를 공유하는 이들에게 붙는다. ‘비혼주의자’가 비혼주의비상대책위원회나 비혼주의경영학회를 설립해 서로의 신념을 공고히 한다는 얘기를 들어본 기억은 없다. 반대로 결혼했다고 해서 ‘결혼 주의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MZ세대라는 저 괴상한 꼬리표와 마찬가지로 ‘비혼주의자’ 역시 기혼자 집단의 흉흉한 음모에 의해 탄생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실은 이미 미혼자라는 훌륭한 단어가 나와 있지 않았는가? 기혼과 미혼은 마치 음과 양처럼 조화롭게 존재했다. 미혼에서 기혼으로, 그리고 몇몇 기혼은 다시 미혼으로 돌아가며 우주의 균형을 맞추었다.


비혼은 이 균형을 깨뜨리는 모난 돌이다. 질서의 수호자인 기혼자가 저 단어를 구태여 만들어 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비혼주의자’는 결국 비혼주의자가 빚어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비혼주의자에게 결혼이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지가 아니다. 격하게 거부해야 할 진상 손님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한국 사회에서 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는지로 평가된다. 그 과업이란 ‘좋은 대학-좋은 회사-결혼 적령기에 결혼-출산-자식 세대에서 무한 반복’이라는 일정한 서사 구조 내에서 돌아간다.


명절날 과일 껍질이 벗겨지기 무섭게 “그래서 넌 결혼 언제 하니?”라는 독촉장이 날아온다. 대출 상환을 촉구하는 채권자의 태도와도 비견될 만하다. 어물쩍 넘어가려는 처세술에도 한계가 있다. 소위 ‘결혼 적령기’를 넘겼다고 해서 형법에 저촉되는 건 아니건만 죄인이 된 듯한 옅은 죄책감을 지우기 어렵다.


이젠 당당하게 맞서기로 한다. 사과의 옆구리를 찔러대던 조그만 포크를 내려놓고 “저, 결혼 안 할 거예요.” 당돌하게 선언한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집안 어르신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래도 말년에 비참하게 늙어 죽지 않으려면 결혼은 해야 한다는 둥, 누구는 벌써 애가 둘이라는 둥, 침팬지 등의 영장류와는 달리 인간은 일부일처제라는 혁신적인 제도의 축복을 받았다는 둥, 결심을 흔들만한 이야기를 잔뜩 들려준다.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지만 딱히 할 말은 없다. 논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념을 명명할 이름표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인식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만 논쟁할 수 있고, 이름은 뭔가를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된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언에도 이름이 필요하다. 그렇게 비혼주의자가 탄생한다.


자본주의자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자라고 부르지 않지만, 비혼주의자는 자신을 그렇게 지칭한다. 비혼주의라는 방패로 막아내야 할 외부의 침공이 있기 때문이다. 다음 명절부터는 “저 비혼주의자예요.”라는 문장을 들려줄 수 있다. 결혼을 압박하던 집안 어르신은 말씀하시겠지. “뉴스에서 봤던 그 되바라진 녀석이 바로 네 놈이었던 게냐.” 화제는 어느새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한 사촌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처럼 비혼주의 선언은 구태여 한 번씩 할만한 가치가 있다. 비혼주의를 선언했다고 해서 누군가가 혼인신고 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다. 알맞은 상대를 만나면 비혼주의를 철회하고 ‘이제야 내 짝을 찾았다’며 수줍게 고백하면 된다. 아직 결혼 못 한 친구가 도끼눈을 뜨고 “너 결혼 안 한다며?”라고 추궁한다면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사람이 인연이라는 게 있더라. 하하하.” 이렇게 너스레를 떨어주자.


만약 정말로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이럴 때도 비혼주의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자존감을 고양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 연인과 동거하거나, 친구와 함께 지내거나, 마음 맞는 사람끼리 공간을 공유하는 등 대안적인 가정의 형태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2021년 기준 전체 가구 중 30% 이상이 1인 가구다. 여기에 2인 가구까지 합치면 거의 60%에 육박한다. 부모님과 두 자녀가 함께 사는 핵가족은 이제 상대적 소수가 되었다.


시대가 변했다. 꼭 결혼해야 하는가? 꼭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 이런 불경한 질문이 수면 위로 새어 나온다. 그리고 꼭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보다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번 돌아오는 명절에 비혼주의를 선언해 가정과 내면의 평화를 도모해 보는 건 어떨까? 물론 가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 바란다. 모든 비혼주의 선언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하에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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