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자아를 모으며 산다는 것
"나다운 게 뭔데?" 드라마에서 이 대사만 들어도 앞뒤 장면이 그려진다. 남에게 휘둘리며 살아온 주인공.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기 자신대로 살기로 한다. '평소 너답지 않게 왜 그래?'라는 질문이 날아오고 주인공은 울컥하며 반문한다. 나다운 게 뭐냐고. 그 나다움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해변으로 간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문득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인생을 살았던 유일한 시간.
나답다는 건 뭘까? 나는 수많은 경험과 욕망과 감정의 덩어리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 자주 변해서 탈이다. 나다움이란 언뜻 보기에 일관성을 내포한다. 나라는 단일한 실체가 있고 그 실체의 특성을 나열한 게 나다움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의 나다움은 수시로 변화한다.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달라진다. 회사에서나 가정에서나 친구 사이에서나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의 나는 통합된 실체라기보단 파편화된 조각에 가깝다. 나라는 존재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회사에서의 나, 가정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는 각기 다른 모습을 띤다. 살아남아야 하니까. 사회와 조직이라는 거대한 세상에서 말이다. 새로운 규칙과 관계 아래에 놓일 때 사람은 자기 분열을 시작한다. 그리고 대개 둘 중 하나의 과정을 거친다. 그 수많은 페르소나를 수용하거나, 부정하거나.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 회사 아닐까. 회사원은 조직의 논리 아래 다른 사람이 되도록 강요받는다. 이는 조직의 통과의례이자 규범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나다움을 유지하는 이는 있기 마련이다. 운 좋게 그런 사람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지는 곳이라면 몰라도 대개는 정을 맞는다. 그것도 아주 세게.
조직에 적응하는 과정은 단순히 규칙을 따르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성적인 인간으로서 가졌던 상식을 버리고 '조직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왜'라는 질문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려 해도 삼켜야 한다. 감히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실 조직 안에서 자아가 분열되는 건 위계질서의 몫이 크다. 상식이나 규칙조차도 위계 앞에서는 다르게 적용된다. 위로 올라갈수록 규범은 선택사항이 된다. 그 규범을 규율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당당했던 이가 상사 앞에서는 왜 그렇게 쪼그라들까. 나 역시 마찬가지다. 속에선 천불이 나지만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기 바쁘다. 그나마 비굴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최선이다. 죄송합니다. 처리하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내 생각이, 나다움이 사라져 간다. 나를 한번 꺾을 때마다 하나씩.
물론 모두가 조직에서의 자신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아니, 애초에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 또한 나의 모습이고 내 인생이다. 동시에 계속해서 그렇게 살 이유도 없다. 만약 분열된 자아가 주는 모순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해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면 말이다. 나를 누르고 조직을 세우는 삶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면 된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조금 더 내면의 소리를 잘 받아 적어야 한다.
내가 그리는 자유란 여기저기 흩어진 자아가 한 점으로 통합되는 이미지다. 어떤 가면도, 가식도 필요 없다. 있는 그대로 살아도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는다. 그런 삶을 쟁취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조직의 맨꼭대기로 올라가거나, 미친척하고 마이웨이로 살거나,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으로 가거나. 이 중 세 번째, 나다움을 보일 수 있는 공간은 '고요함'이다. 고요함은 조용함과는 다르다. 조용함이 물리적으로 소리가 없는 상태라면, 고요함은 내가 철저히 나일 때 나온다.
난 자연이 좋다. 자연은 나에게 무엇이 되라고, 어떤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내버려 둔다. 무심하면서도 편안하다. 그 어느 집단이나 조직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받아들여짐'을 느낀다. 받아들여진다는 감각은 나다움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나를 쉽사리 내보일 수 없다. 주변에 방어막을 겹겹이 치거나 두꺼운 페르소나를 둘러 쓴다. 인간의 당연한 방어기제다.
끊임없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는 한없이 움츠러든다. 내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조직에 순응한다. 그렇게 짖는 법도 잊은 강아지처럼 낑낑거린다. 이게 맞는 걸까? 난 나답게 살고 있나? 회사에서의 나를 부정하며 살아간다면 내 삶을 긍정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긍정하기에도, 부정하기에도 내 모습은 꽤나 초라했다. 회사에서는 말이다.
내가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고요한 공간. 그런 공간은 회사에 없었다. 단순히 일이 많고 적고, 상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여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목민처럼 떠날 시간이 다가온다. 더 나은 환경으로, 내가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 장소로. 조직에서 버틸 인내심도, 마이웨이로 살 깡도 없는 나는 그렇게 퇴사를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