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위를 바라볼 때 옆을 보니,

그제야 퇴사라는 출구가 보인다

by 신거니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인류에 의해 지구는 완전히 얼어붙는다. 남은 생존자들은 설국열차에 오른다. 일 년 내내 전 세계를 돌고 있는 설국열차. 꼬리칸에 있던 사람들은 머리칸으로 전진한다. 더 나은 환경과 자유를 얻기 위해. 갖은 희생과 고생 끝에 머리칸 앞에 도착한다. 문을 열어달라는 주인공 커티스의 말에 기차의 보안설계자 남궁민수는 대답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 문을 여는 거야. (뒤에 있는 문을 보며) 이런 문이 아니라, (옆에 있는 문을 가리키며) 이 쪽 문을 여는 거야.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붙은 채로 있다 보니까 이게 이젠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지? (영화 '설국열차' 중)


기차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길만을 제시한다. 그저 앞뒤로만 움직일 수 있다. 꼬리칸에 가까워질수록 비참해지고, 머리칸에 다다르면 천국 같은 삶을 누릴 수 있다.


그게 전부일까? 조금만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면 밖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물론 바깥에는 매서운 바람이 분다. 모든 게 꽁꽁 얼어있다.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궁민수는 기어이 그 금기의 문을 열어낸다. 그렇게 '바깥'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위로, 더 위로 올라가야 해. 그렇게 배웠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집, 이 모든 걸 탐닉해야 했다. 그리고 끝없는 경쟁. 누군가를 하나둘씩 밟고 올라서야 한다. 현실 속 머리칸에 도달하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꼬리칸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죽어라 노력하고 독하게 살아야 한다. 노력, 그리고 노오력.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손에 굳은살이 배기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그래도 이 모든 분투가 언젠간 보상받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안고 위로 향한다. 적어도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나의 이야기가 아닐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없을까? 아래위, 앞뒤가 아니라 옆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상상. 이 발상은 실로 차원을 넘나 든다. 1차원 '선의 세계'에서 2차원 '면의 세계'로. 더 나아가 3차원 '공간의 세계'로.


선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 면을 바라보면 뭐가 보일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하지 못하면 불확실하다. 불확실성은 두려움으로 이어진다. 두려움은 사람을 뻣뻣하게 만든다. 그렇게 선에 갇힌 채 살아간다. 심지어 누군가는 0차원 점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앞으로 나아갈 힘조차 없다.






사무실 입구에 조직도가 떡하니 붙어있다. 누군가는 분명 그 잘 짜인 피라미드를 보며 안정감을 느끼겠지. 숨이 막힌다. 나를 짓누르는 내 위의 사람, 그 위에 있는 사람, 그 위에 있는 어떤 다른 사람. 회사는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정상에 올라야 한다. 그게 네가 회사를 다니는 이유다. 연신 목줄을 쥐고 이리저리 흔든다.


퇴사란 그 목줄을 푸는 행위다.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앞이나 위가 아니라, 옆을. 당연하지만 '옆'에도 삶은 존재한다. 다른 형태의 삶을 부정하는 것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도 좋지 않다. 긍정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긍정은 '낙관'과 다르다.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다.


다른 형태의 삶을 상상하려면 긍정해야 한다.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그렇게 어렴풋이 뭔가가 보인다. 나에겐 그게 퇴사였다. 꼭 퇴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억해두자. 언제든지 대안이 있다.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설국열차에 갇힌 기분이 든다면 문을 열어 바깥세상을 맞이하자. 차갑지만 포근한 공기가 나를 감싸고, 소복하게 쌓인 눈밭이 펼쳐진다. 그 위엔 아마 내 발자국만 선명하게 남겠지.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이니까. 발걸음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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