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공부하고 있는 열 살 남자 진오(1, 가명)에 대하여 작성한 리포트 일부이다. 엄마와 아빠 앞에서의 녀석은 내가 알 길이 없다. 엄마에게도 내게 하듯 매 순간 재재거리는지, 하루 종일 로블록스만 붙잡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함께 다룰 책이 “장애란 뭘까?”인데 포세이큰의 술래잡기 이야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녀석이 '장애'와 관련된 배경지식을 잔뜩 늘어놓고, 놀랍게도 그 지식이 정확하고, 게다가 듣기에 흐뭇한 에피소드를 쉴 새 없이 이야기하는 아이라는 것을 부모님이 이미 알고 계시든 모르고 계시든, 나는 그것을 적는다.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이 무조건 맞고 엄마말은 무시하기 시작해 모자 사이에 조금씩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진오(2). 아들 교육으로 한창 고민의 시기를 보내고 계신 어머니에게 내 마음을 건드렸던 그날의 진오(2)를 보내드린다. 처음 보는 진오(2)의 '글썽임'이었다.
제멋대로 구는 데다가 하는 말마다 튕겨내고 마는 아들에게도 이렇게 몰랑몰랑하고 따뜻한 감수성이 있다고 슬쩍 귀띔한다.
부모님께 발송하는 [활동 리포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짧게는 두 시간, 길게는 네 시간의 수업이 쌓이면 활동 리포트를 1회 작성한다. 그리고 웹사이트로 게시하여 링크를 공유하면, 부모님은 링크에 접속해 매주 업데이트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리포트를 구성하는 목차는 아래와 같다.
진오가 새롭게 배운 것
진오의 인상적이었던 모습
멘토가 가이드하고 있는 부분
전달 사항
함께해 주세요.
아이들마다 구성은 조금씩 달라지고 수업에 따라 변동되기도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모습]과 [새롭게 배운 것]은 반드시 채운다.
학생수가 많지는 않지만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나를 놀라게 했던 표현, 좋거나 나쁜(주로 위험한) 행동, 찰나의 표정들을 복기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을 골라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평소와 다르게 수업 태도가 좋거나 멋진 글 한 문장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보고서에 쓸 내용이 많아져 신이 나 몇 시간을 할애할 때도 있고, 아이가 감동적인 동시를 짓기라도 하는 날에는 AI와 싸워가며 동시와 어울리는 삽화를 제작하여 첨부한다. 그런 날은 하루 일정이 통째로 ‘리포트 쓰기’가 된다.
활동 리포트는 수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게는 '그럴듯한 것'이 필요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국어나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실력과 성과가 증명되지 않은 나를 자녀의 선생님으로 선택한 부모님에게 '체계적'인 수업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귓가에 맴도는 말이 있다. 어느 회사를 다니든 잊을 만하면 자기 검열을 하게 만드는 말.
“쟤네는 하루 종일 앉아서 뭐 하니?”
과거 어느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에서 근무하던 시절 당시 대표가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 다른 직원들에게 소위 말하는 “월급 루팡”의 프레임을 씌우고는 내게 종종 하던 말이었다. 그들에게 직접 묻지 왜 내게 묻는지 지금 돌이켜 보아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상황이 반복되다 보면 그것이 곧 내게 하는 말로도 들렸고, 그 말은 오래 남았다. 발화자의 말의 목적이 뭐가 됐든 굳이 그 불편한 말에서 얻은 것을 하나 꼽자면, 고용주는 노동의 대가를 받는 사람이 하는 일이 겉으로 ‘보이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영어나 수학은 문제를 풀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점수라는 것이 있어, 그 숫자는 선생인 나와 학생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로써 활용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내게 바라는 것은 결국 아이가 스스로 ‘많이’ 읽고 ‘잘’ 쓰게 되는 일일 것인데, 어디 가서 상이라도 하나 타오지 않는 이상 이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그 부분을 잘 이해하고 계시리라 믿으면서도 이 선생님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보고 받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에 더하여 학부모와 나, 학생과 나 사이에 신뢰를 쌓는 과정 중 하나로써 첫째는 당신이 목소리 한 번 듣지 않고 고용한 내가 사실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알리고, 둘째는 나를 통해 아이가 배우는 것과 부모가 사전에 기대했던 것을 일치시켜 나가기 위해 이 “보고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었다.
한편, 수업을 시작할 때 즈음 우연한 기회로 아파트 단지 상가 내 위치한 학원에서 하루 정도 그 시스템을 엿볼 수 있었다. 그곳은 수학과 영어를 주력으로 하고 확보된 학원생으로부터 추가 매출을 올리기 위해 독서논술 과목 개설을 앞둔 말 그대로, 흔한 동네 학원이었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이 그날 문제집에서 풀었던 부분을 촬영하고, 매일 부모님에게 사진과 그날의 숙제를 메신저로 발송하고 있었고, 추가로 월 1회 부모님과 유선으로 상담을 한다고 들었다. 방식을 떠나 매일 쌓인 사진 데이터를 통해 부모는 ‘아이가 학원에서 뭐라도 하긴 하는구나’ 하는 편안함을 느낄 수는 있겠으나, 콘텐츠 자체의 효용은 글쎄 판단하기 어렵다.
나는 일대다가 아닌 일대일로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특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나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에 나만 발견한 아이의 행동과 말을 때로는 글자 그대로, 때로는 나의 해석을 곁들여 부모님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 소중한 시간들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였고, 그것이 휘발되지 않도록 정성껏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기록이 상대방의 모바일 장치에 쌓이다 점점 불필요한 데이터가 되어 결국엔 스마트폰이 저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삭제 대상 후보로 꼽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도 있었다.
부모님이 진짜로 궁금한 것은 아마 “무엇을 배웠는가”일 것이다. 하지만 적게는 2,000자에서 길게는 4,000자에 이르는 이 보고서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당신의 자녀는 이런 아이입니다.”
보고라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날 한글도 채 못 땐 여덟 살 아이가 기가 막힌 동시 하나를 뚝딱 만들고, 책을 읽어줘야만 겨우 듣는 남자아이가 어느새 이야기에 푹 빠져 재미있는지 나를 쫓아 소리 내어 읽으며 심지어 연기까지 곁들이는 모습을 놓칠 수가 없다. 입 냄새 폴폴 풍기며 툴툴거리고 앉아있는 거친 남자아이와 함께 책을 읽다가 언뜻 보였다 금세 지워버린 아이의 사랑스러운 표정을 마음에 새기는 이가 선생인 내가 아닌 이 아이의 엄마였다면, 아이들의 성장과 부모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더 단단해질지 아쉬운 마음에 상사가 시키지도 않은 보고서 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물론 아이들이 매 시간마다 보고서 “쓸 거리”를 주지는 않는다. 어쩐 일인지 집중력이 바닥이라 오히려 준비해 간 수업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할 때는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사실 그 고백은 나 대신 좀 혼내달라는 숨겨진 욕구이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을 때도 전달사항이라는 제목을 붙여 알린다. 혹시 이미 인지하고 계시는 부분이라면 무시해도 좋다는 코멘트와 함께 말이다.
억지로 뭐라도 쥐어짜 내어 쓰기 위해서는 티끌만 한 성장이라도 발견해 보려고 애를 써야 하고, 또 그 성장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사람은 선생님이니 수업 준비에도 더 정성을 들일 수밖에 없다. 내가 준비를 한 만큼 아이들이 말과 글로 보여준다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또 보고서에 알찬 내용이 가득 담긴다.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칭찬해 주세요.”라는 문장에 엄마가 아이를 독려해 주면 인정받은 아이는 또 나와 함께하는 시간에 더 집중해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국 이 보고서는 선생에게도 무조건 득이 되는 일이다.
아이들이 자라 여러 형태의 발표를 앞두고 긴장으로 떨고 있을 때 문득 “어렸을 때 어떤 과외 선생님이 나보고 말 잘한다고 엄청 칭찬해 줬었는데…?” 하고 떠올리다 어느 순간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면.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흩어진 글감들을 그러모으던 중 “너는 이것을 잘한다.” 하고 주변의 일관된 평가를 받았던 것이 무엇이 있었나 하며 과거를 되짚는다면. 그 고민을 듣던 부모님이 “너 어렸을 때부터 시 잘 썼어.” 하고 잊고 있던 재능을 다시 일깨워 준다면. 그러자 때마침 소중히 보관되고 있던 일련의 기록을 직접 마주한다면. 어릴 때 스쳐 지나가듯 들었던 칭찬, 가족이나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시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든든한 레퍼런스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남의 자식 육아일기를 대신 써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풉.” 하고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