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yaChoi Dec 30. 2023

SF 전성시대

정상인이십니다요!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새 밑, 또 한 해가 꼴까닥 저문다. 어제는 같이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주일 전에 영씨가 미리 주문받아서 사온 아메리카노 두 잔, 까페 라떼, 디카페인 라떼와 딴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가져온 빵과 과자를 모아두고, 별이씨가 좋아하는 김동률 노래를 들으며, 수다 반 그림 반 시간을 보냈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이야기 중에, 요즘 꽤 인기 있는 MBTI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검사할 때마다 왔다 갔다 바뀐다고 이야기했지만, 아직까지 나는 늘 똑같다.

        계획적인 J냐 즉흥적인 P냐를 두고 말이 오가자, 일주일 전에 미리 주문받은 걸 잘 외워서 그대로 사 온 영씨는 P인데, 종종 잘 세워뒀던 계획을 한순간 확 엎어버리고 딴 걸 하지만, 아주 가끔 한 가지에 집착하며 계획적이라고 말했다. 평소 계획이라고는 없는 내가, 자기 계획을 바꾸면 괜찮지만 남의 계획을 확 바꾸면 싸움난다고 말했더니, 다들 하하하 웃었다. 가족끼리 여행 가면 놀 때는 잘 대동단결하지만, 희한하게 먹는 거 때문에 꼭 사달이 났다. 딸이 온갖 인터넷을 뒤져서 정성껏 찾아둔 맛집을 찾아가다가,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힘들어서, 가는 길에 보이는 음식점으로 몇 번이나 쑥 들어가려다가, 딸이 '엄마는 그걸 못 참고...' 하며 타박해서, 밥도 먹기 전에 곤란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친구들 만났을 때, 선이가 '다들 S는 있지?' 하길래, 나는 'N인데...' 하며 머쓱해졌었다. 이게 또 무슨 차이인지 내내 궁금했던 내가 이때다 싶어서 물어보니까, 모두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S는 현실주의고, N은 공상을 많이 한다고 알려줬다. 맞네, 나는 종일 멍 때리기도 하고, 멀쩡히 물건을 앞에 놓고 정물화를 그리다가도 나도 모르게 세상에 없는 엉뚱한 걸 그려서, 선생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엄격한 선생님들은 내가 딴 데로 못 새도록 매번 '틀렸다'고 지적하고 고쳐줘서, 결국 식은땀에 흠뻑 젖은 나는 오래 못 버티고 화실을 옮겼다. 요즘같이 세상이 빨리 바뀔 때, 나 같은 비현실주의자는 사회부적응자가 되기 십상이다.

        그 무엇보다 나를 괴롭히는 건 사실관계를 열심히 따지는 T다. 늘 행복하고 싶다고 말하던 친구가 회사에서 아주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며 찾아와서 오래 하소연했다. 나는 복잡한 전후 상황을 꼼꼼하게 살피고, 걔가 잘못했네, 다들 너무 했네 맞장구치다가, 그래도 더 힘든 사람들에 비하면 니 상황이 아주 나쁜 건 아닌 거 같다, 이렇게 저렇게 잘 견뎌보라고 나름 팁을 주며 응원했더니, 친구가 버럭했다. '다른 사람 큰 상처보다 내 작은 상처가 나한테는 더 아프다', '그냥 공감을 원하지, 니한테서 해결책을 원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던 구는 이제 보니 감정에 매우 충실한 F였다. 기껏 애썼지만 욕먹은, 드라마 대사 같은 친구 말이 뇌리에 박혔는데, 진짜 어떤 드라마에서 딱 나 같은 인간이 또라이 T로 등장했다.

        자기 MBTI가  마음에 드는 거 같은 영씨가 내 MBTI를 물어서 *이라고 했더니, 순간 다들 조용해지며 그림만 그렸다. 언젠가 회의에서 아주 활달한 외향형 E+++ 인사관리 전공자를 만나서 곁다리로 MBTI 이야기를 듣다가, 요즘 회사에서는 나같은 *을 안뽑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슬쩍 물으니까, 나 같은 사람은 연구직이 잘 맞다며 씨익 웃길래, 이 무슨 어마무시한 편견인가 싶어서 속으로 억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타인의 감정 공감할 줄 아는 인간관계가 금과옥조 같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는 S도 고, F도 다. 도록이면 사람들을 멀찍이 피해 다니지만, 어제처럼 익숙한 사람들을 만날 때 포장이라고는 없는 내 이야기에 모두 참지 못하고 웃는 걸 보면, 나도 반쯤 SF에 걸쳤나 착각해본다.  


        SF (Science and Fiction) 공상과학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이 SF (Sensing & Feeling) 전성시대에, 딴 세상을 꿈꾸며 남들이 금그어둔 정상인의 범위를 삐뚤빼벗어난다.


        https://ko.wikipedia.org/wiki/MBTI

     I (Introversion) E(Extroversion)

     N (Intuition) S (Sensing)

     J (Judging) P (Perceiving)

     F (Feeling) T (Thinking)

     


       올 한 해 작가님들, 독자님들 덕분에 즐거웠어요. 모두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전 08화 깨알 인센티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