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력운동을 시작한 후 세 번째로 만난 트레이너와 꽤 오래 운동하다 보니, 어느새 그는 남편 빼고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에는 운동도 사람도 낯설어서 그저 입 꾹 다물고 어설프게 따라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운동과 운동 사이 짤막한 대화가 끊길 듯 말 듯 1년 넘게 이어졌다.
잘하는 거라고는 땡하면 시간 맞춰 나타나는 거밖에 없는 내 앞에, 어느 날 트레이너가 기구에 부딪혔다며 왼손 검지가 시커멓게 퉁퉁 부은 채 나타났고, 놀란 나는 센터에서 찾은 굵은 빨대를 잘라서 만든 간이부목을 대고 수건을 잘라 붕대처럼 감아준 뒤, 얼른 응급실에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며칠 뒤 손가락에 조그만 기브스를 하고 나타난 그는 사실은 부딪힌 게 아니라, 길에서 어떤 진상 손님이 늙은 택시 기사의 멱살을 잡고 시비거는 걸 보고 말리다가 한 대 쳤는데, 그만 손가락 뼈에 금갔다고 말했다. 더 놀란 나는 마시던 물을 꿀꺽 삼키고, '안돼요!' 하고 말했다. 우리나라 법은 의외로 정당방위가 적고 쌍방과실이 많아서 때렸다가는 다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에 절대 폭력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억울한 표정으로 알았다던 그는 길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아무도 늙은 택시 기사를 안 도와주냐고 되물었고, 나는 침묵했다.
잘 웃고 붙임성이 좋은 트레이너는 의외로 책읽는 게 좋다며 질문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 마흔에 결혼했고 이제 애 낳으면 환갑에 애가 대학 가는데, 돈이 얼마나 있어야 하고, 얼마나 오래 일해야 하냐고 물었다. 애 키우는 돈을 묻는 건지, 노후에 스스로 살아갈 돈을 묻는 건지 모르겠지만, 순간 머릿속으로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동안 내가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그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앞으로 돈 벌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얼마나 오래 살지, 죽을 때까지 돈이 얼마나 더 필요한지를 생각하다가, 도무지 계산이 되지 않아서 멈칫했다. 내 속을 알리 없는 그는 '10억?' 했다. 후유,,, 큰 돈이네... 그걸 내가 어떻게 알까...? 물 한 모금 넘긴 나는그의 입장에 집중하기로 하고 '트레이너는 정년이 없는 일이니까,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열심히 일하시면 되죠' 하고 대답했지만, 그는 피트니스 센터에 물이 새서 수리하느라 큰 돈이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가끔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여주는 그의 얼굴엔 기쁨과 걱정이 번갈아 지나갔다. 의사의 한 마디에 고뇌하고, 또 한 마디에 안심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따라 걱정하다가 또 안심하며, 애가 태어나면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를 확인하고 기뻐하게 된다며 웃었다. 그런 내게 그는 또 뜬금없이 '왜 열심히 사시게 되었어요?' 하고 물었다. 그는 참 어려운 질문을 많이 한다! 본인은 어렸을 때는 부모님 때문에, 지금은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산다는 말을 들으며, 순간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하는 시구가 떠올라 웃다가, 나는 'C'est la vie! (쎌라비)' 하고 대답했다. 불어를 모른다는 그에게 'It is the life'와 '그게 인생이다'로 번역해 주니까, 집사고 돈 벌려고 열심히 살게됐다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대답이 너무 철학적이란다.
조금만 무게를 늘려도 아프다며 비실거리는 나이든 여자에게 운동을 가르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어서, 트레이너는 나를 자주 초딩 3학년에 빗댄다. 언제 고3 수준이 되고, 언제 성인 수준이 될지 까마득해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래도 어쩌겠나, 마음에 안들어도 내 몸인 것을. 노화와 노쇠는 다르다며, 매일 운동하라고 독려하는 건장한트레이너의 말이 귀에 쟁쟁하여,더 늙어도 내내 어깨를 내리고 등을 꼿꼿하게 펴려고, 비싼 돈 들여서 더듬더듬 운동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