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투쟁은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특집 '고려대분회' 닫는 글] 편집위원 유리

매년 비슷한 내용의 투쟁이 비슷한 시기와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올해는 440원이었다. 무더운 여름, 100일 넘게 이어진 투쟁이 끝났다. 협상이 타결되었고, 400원이라는 임금 인상분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노조 측은 승리를 주장한다. 옆에 있던 학생들은 공연히 밥을 얻어먹었다. 백 일 넘게 공들인 것에 비해 얻는 것이 너무 약소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자본)는 조금씩 갉아 먹지만 우리(노동자)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단결투쟁가 중)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단결한 민중은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중)


거짓말. 너희는 맨날맨날 와구와구 갉아먹지만 우리는 정말 조금씩만 되찾는 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세상이 바뀔 거야’와 같은 의미 부여도 어딘가 미심쩍다. 되찾기 이전에 한꺼번에 무너져 버릴까 두렵기까지 하다. 단결한 민중이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떠한가. 이것이 사실이더라도 공동의 이익을 발굴하고 이를 위해 함께 힘을 모은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원청과 하청의, 조직과 미조직의, 정주민과 이주민의, 그리고 각 산업의 노동자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같은 선에 뭉쳐 투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변. 화. 또박또박 발음해본다. 무엇이 변화지? 임금 인상 잘하면 그것이 변화인가? 그렇다면 임금 인상을 못 하면, 투쟁에서 지면 그것은 실패인가? 임금 인상 잘하고 협상력 좋은 것은 대기업 정규직 아닌가? 그럼 대기업 정규직 투쟁이 세상을 바꾸는 것인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지. 그건 아니지.


만약 투쟁에 실패라는 단어를 쓰고 싶다면 그것은 임금을 인상하지 못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더 이상 공동의 대안을 토론하지 못할 때 쓰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비정규직이 기본적인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당연시할 때 쓰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이 투쟁에 관심 갖지도 연대해야 하는 이유도 답하지 못할 때 쓰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 실패는 명명백백히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고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는지 억울해하며 엉엉 울어도 좋겠다.


협상이 실패했다고 운동이 실패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협상을 성공시켰다고 운동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살게 하기도 좌절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복잡하고 어려워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아무 것도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좌절한다. 그런데 운동이 그렇게나 길다는 사실, 즉 내가 투쟁하는 이 현장마저 앞선 이들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통한 것임을 깨달을 때 위안을 받는다.


한 학생은 강의실을 찾다가 빨간 몸자보를 입은 청소노동자가 복도를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그 조끼에 적힌 글자를 자세히 보지는 못하였으나 어느 더운 여름 연이어 보도되었던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기사가 그 조끼와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스쳐 지나갈 기사였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오래 살펴본다. 또 다른 학생은 고려대 분회의 본관 점거 소식에 화들짝 놀라 점거 기간 중 이따금 본관을 방문했을 수도 있다. 본관에서 조합원들 앞에서 발언도 하고 인터뷰를 원하는 기자에게도 응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부터 자신이 뱉은 말의 의미를 짊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 노동자는 중년에 시작한 노동조합 활동으로 ‘평생 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다른 관의 노동자들을 만나고, 함께 모이니 자신의 일터를 바꾼다. 나의 사업장 너머의 있던 노동자들이나 사회의 소식에도 조금 더 관심 두게 되었을 것이다.


고려대분회의 투쟁은 단지 임금 인상 투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인상한 400원이 오직 임금일 수만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이루어낸 것을, 이루어내야 할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감히 지지 않는다.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간절한 삶이 이 너절한 세계를 지지하는 힘인 까닭으로.



편집위원 유리 / beisolated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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