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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선언: 이곳은 우리의 골목이다

[Re;] 편집위원 유리

[Re;] 2022 여름 148호 「을지OB베어: 만선이 빈곤이 된 사회에 대하여」



여름은 생맥주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낮의 열기가 어설프게 식은 아스팔트 위, 모기를 쫓으며 노상에서 먹는 맥주를 마다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래서인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여름은 1년 중 어느 때보다 빽빽하고 왁자지껄하다.


작년 여름 발간된 《고대문화》 148호에서는 을지OB베어의 강제 철거 소식을 전한 바 있다. 아직 밤공기가 서늘했던 봄의 어느 날 을지OB베어가 철거된 골목 위에서 을지OB베어 사장님과 연대하는 시민들, 활동가들은 두 개의 계절을 모두 보냈다. 그리고 지난 11월 30일, 을지OB베어는 〈골목 선언〉을 끝으로 노가리 골목에서의 투쟁을 마무리한다. 그날, 초겨울의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뜨거웠던 여름날과 달리 무척 한산했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칼바람은 내 살을 베는 듯했다.


11월의 마지막 날 노가리 골목을 울린 골목 선언에서 을지OB베어는 더 이상 만선과의 상생을 포기함을 이야기했다. 사실 이날만의 이야기는 아니었고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을지OB베어의 요구는 조금씩 변화했다. 주목할 점은 초기 투쟁이 주로 노가리 골목에서, 이 골목을 방문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장 알리기에 집중했다면(주로 만선 불매, 상생 강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중구청 앞에서도 시위 집회를 적극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을지OB베어는 〈골목 선언〉에서 아래와 같이 그 이유와 성과를 밝히고 있다.


지난 반년, 중구청 앞과 골목에서의 투쟁으로 우리는 중구청과의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으며 중구청에 다시는 을지OB베어 같은 아픔이 재현되지 않도록 공적 이주의 선례를 요구하고 있다. 중구청과 서울시에 요구한다. ‘서울미래유산’이나 ‘백년가게’와 같은 겉만 번지르르한 홍보성 짙은 일회성 정책이 아닌 젠트리피케이션 방지와 지속 가능한 골목 문화 형성을 위한 선례를 위해 지금이라도 을지OB베어에 사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에 나서길 촉구한다.


을지OB베어는 정들었던 골목을 떠나 새로운 골목으로 이주할 것임을 밝혔다 동시에 중구청 앞에서는 현장 예배와 ‘을지OB베어와 함께하는 연대하는 채식인 모임’이 준비하는 음식 나눔이 매주 금요일 진행된다.


6개월 동안 덥고 추운 모든 날을 버텨서, 그래서 도대체 뭐가 바뀌긴 했느냐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맞다. 을지OB베어는 그 골목에서 쫓겨났다. 연대와 투쟁의 순간들이 아무리 빛나고 즐거웠더라도, 쫓겨났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쫓겨남’을 소극적 개념으로 이해하곤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체제에 의해 축출되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이들은 누구보다 능동적으로 그 체제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춘다. 설사 그것이 그들이 온전히 원한 것이 아니더라도. 지난 6개월의 시간은 그런 빛의 시간이었다. 무엇이 바뀌었느냐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골목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미 이 골목에서 각계각층의 연대로 이루어진 연대의 문화를 일궈냈으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독점으로 쇠락하는 동안 새로운 상생의 골목을 일구기 위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모든 순간순간은 이미 새로운 골목으로의 선언이었으며, 을지OB베어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편집위원 유리/beisolated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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