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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앞에서 연결을 재생산하기

[특집 '기후위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 편집위원 희음

‘환경 파괴’라는 이름은 오래되었다. 우리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환경 보존 대 개발’과 같은 토론 주제를 마주했고 각종 기후협약의 이름을 외우기도 했다. 이제 ‘환경 파괴’, ‘지구온난화’는 기후위기, 심지어는 기후재난이라고 불린다. 인류의 발전을 위해 개발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고 우리가 녹색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그렸던 미래의 모습은 폐허였기 때문에 현재진행형인 기후위기를 우리는 실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당도한 기후위기는 우리에게 인류의 절멸 대신 약자의 죽음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여름 폭염에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던 이주노동자, 폭우에 물에 잠긴 반지하방에서 나오지 못한 주민들, 대규모 지진에 대비할 새도 없이 죽음을 맞은 사람들. 기후위기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언뜻 거대하고 돌이킬 수도 대비할 수도 없어 보이지만, 누가 죽고 누가 피해를 입는지는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그것을 발생시키는 체제에 대해 쓰고 창작하는 것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예술은 이런 위기 앞에서 무용하고 쓸모 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을 지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지속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코로나19를 거치며 우리가 그토록 강조했던 서로 돌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당도한 위기 앞에서 연대하고 돌보고 창작하는 것의 의미를 돌아본다. 



그림 설명 시작.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그림 설명 끝.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의 선언문(2022.07.)

1. 기후위기는 미래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이미 도래한 위기입니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기후위기를 각자의 고유한 언어로써 증언하고자 합니다. 증언의 연대로 서로에게 응답하고 서로의 삶에 공명하고자 합니다.

1.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창작장 안에서의 돌봄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상호의존과 관계 맺기의 가치를 중시하면서 창작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부수적인 작업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는 모든 예술 활동이 시장화 되는 지금의 자본적 주목경쟁과 관심경제를 문제시하며, 이에 대한 대안적 장을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1.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기후정의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매개로 하여 창작자 간의 수평적이고 지속 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는 것을 지향합니다. 착취와 경쟁, 성장을 향해 내달리는 지배적 존재 양식과는 다른 존재 양식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1.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기후위기를 초래한 지금의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추출주의, 능력주의를 비판합니다. 이 거대한 타자화의 조류에 맞서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는 예술 활동은 이에 맞선 저항적 실천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문제적인 체제를 심문하면서 이를 전환하기 위한 공동의 움직임을 만들어나가고자 합니다.

*본 선언문은 이후에 함께 결합한 구성원과의 토론과 합의에 따라 더 나은 방향으로 수정될 수 있습니다.



기후위기 앞에서 연결을 재생산하기


예술은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존재들 안에서 태어나며, 존재들 간의 관계와 사건, 이야기를 필연적으로 기입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예술은 향유자 없이는 어떤 형태, 어떤 장르의 작업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 의의를 획득하지 못한다. ‘문학의 공간’은 텍스트가 빚어질 때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될 때 최초로 구성된다. 대면을 기다리는 것에는 최종적인 전달을 앞둔 텍스트뿐 아니라 창작 과정 중에 있는 작품도 포함된다. 작품은 창작자 및 향유자가 얼굴과 목소리를 맞대고 함께하는 장에서 보다 첨예화되고 본격화될 수 있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 및 지지자, 들어주는 사람, 질문하는 사람이 되는 생기의 장이 필요한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런 장을 꾸려나갈 기회를 너무 많이 앗아간 사건이다.


코로나19라는 이름의 인수공통감염병은 산업화 이후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과 채굴로 인한 생태 파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기후위기를 초래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코로나19는 기후위기의 옆얼굴이기도 하며, 기후위기는 지금-여기에 이미 당도해 있는 삶의 위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위기는 더 가난한 사람, 더 낮은 지위나 계급에 있는 사람, 장애인, 여성, 아동, 난민 등의 사회적 약자, 비인간 동물에게 더욱 직접적이고 집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기후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이 여러 층위의 당사자들에 의해 열리고 있는 지금, 예술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연결될 것이며 예술/창작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사건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때는 2021년 가을이었다. 시작은 한 사람의 기획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부터는 구성원들 모두가 수평적인 위치에서 함께 모임을 만들고 이끌었다. 그럼에도 창작자들을 모이게 한 힘이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처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중요하다. 기획안에는 ‘연결’의 의미가 가장 크게 담겨 있었다.


코로나19라는 사건이 물리적 거리 두기를 불러왔을지언정 정치적·예술적 거리 두기까지 조장하도록 내버려 두어선 안 될 터였다. 기후위기라는 삶의 위기 앞에서 창작자들, 예술 하는 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연결되어 토론하고 공부하고 감각을 나누면서 이 삶의 위기에 대해 예술을 통해 표현하고 전달하고 담론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기후위기 앞에서 연결을 재생산하기. 이것이 창작자들을 모이도록 한 일차적인 이유였다.


연결된 이후에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가 중요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익숙한 방식이어서는 안 될 터였다. 어느 한쪽에 무게 중심이 쏠린 채 한 사람 혹은 소수가 마이크를 쥐고 일방적으로 끌어가는 형태에서의 연결이 아니어야 했다. 기후위기 앞에 함께 선다는 것은, 이 사회의 물적 토대나 구조적 오류뿐 아니라 어떤 상식 체계와 내러티브가 지금의 위기를 초래했는지를 감각하고 성찰한다는 의미다. 중심과 주변, 다수자와 소수자, 목소리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경계, 그 경계에 의한 차별과 박탈을 당연시하는 고정된 믿음들이 바로 그것이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그 믿음에 균열을 내는 이들이어야 했다. 완벽한 평등이란 없겠지만 우리는 특정한 누군가가 높게 솟은 자리에 오래 앉아 있도록 하는 일을 지양하려 했다. 모두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골고루 전해지도록 했다. 온라인 혹은 오프라임으로 모임을 각 회차마다 진행자를 달리하고, 그렇게 모두가 진행자의 자리에 서도록 한 것이 이에 대한 대표적인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후생태위기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누군가를, 혹은 우리 자신의 삶을 침식시킬 수 있는지, 기후위기로 가장 먼저, 또 가장 깊이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이들은 누구인지 알아야 했다. 알기 위해서는 함께 공부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 필요했다.


우리가 왜 이 시대를 기후위기의 시대라 부르는지, 기후위기는 어느 정도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지,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 추출주의, 식민주의, 타자화의 거대한 흐름이 지구가열화를 초래한 과정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여러 텍스트를 참조하며 함께 공부했다. 특히 기후위기가 어떻게 모든 인간이 아닌, ‘어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을 차별적으로 위기에 처하도록 하는지를 논의하면서, 이 위기가 자신(개별 창작자들)의 삶과는 어떻게 관계되는지, 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무엇을 위기로 느끼며 무엇을 실천하려 하고 있는지, 그 가운데서 느끼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기후위기 앞에서 예술은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는가


모임이 거듭되는 동안, 지금-여기에 이미 깊숙이 도착해 있는 기후위기 앞에서 창작자들은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자의 생활 속에서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저마다 행해나가는 작은 일상적 실천과 별개로, 창작 활동을 통한 실천에는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 창작 행위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대항하는 중요한 실천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질문은 우리가 모인 공간에서 제1의 질문이 될 수밖에 없었다.


2기 활동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데 집중했다. 참여자들이 우연히 맞닥뜨린 다양한 텍스트, 공부와 창작의 과정 중에 발견한 진실들을 공유하고 듣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꾸렸다. 누군가는 한국에는 아직 번역 출판되지 않은 인디언계 미국 여성 시인 나탈리 디아즈의 시를 소개했다. 인간의 몸에 흐르는 물이 대지의 물과 다르지 않음을, 영원히 되풀이될 듯한 주술처럼 써내려간 시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지난여름의 폭염에 대한 기록/창작으로, 해수 온도의 상승으로 떼죽음을 당한 물고기의 삶과 인간의 삶을 병렬하면서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각을 증언과도 같은 형태로 기술했다. 또 한 참여자는 2050년의 폭염 속 청년들의 삶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도 일상적인 언어를 담지한 SF 초단편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텍스트와 창작 작업을 나누면서 우리는 대화와 토론을 이어 나갔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후위기 앞에서 우리가 하는 창작 혹은 예술 역시 실천이 될 수 있다는 데 합의했고, 예술은 그것이 이 시대, 긴급하고도 현재적인 위기를 겪어내고 있는 이들의 삶에 대한 하나의 증언이 될 때, 그리하여 그것이 누군가를 돌려세우고, 보다 많은 이들이 기후위기 문제를 바로 지금-여기의 문제로 인식하도록 할 때 기후위기 시대의 실천으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기후위기 앞에서 연결을 재생산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기


텍스트를 나누고 작업을 나누고 삶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듣는 일을 통해 돌봄을 행하는 것은 한편으로 전 지구적 생태 차원의 연결과 돌봄에 대한 상상력을 추동하는 일이기도 했다. 서로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발화하는 목소리와 써내려간 텍스트 속의 빛나는 진의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그런 과정에서 듣는 자의 몸이 움직이고 열리는 것. 이런 경험은 내가 어째서 타자와 완전히 구분되거나 단절되는 존재가 아닌지에 대한, 어떻게 우리는 서로의 삶에 부지불식간에 연루될 수밖에 없고 서로의 삶 안에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체험에 다름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알게 된다. 서로에 대한 듣기와 발견하기를 통한 이 같은 연결과 연루의 경험은 이 지상,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비인간 동물, 생태계의 연결과 얽힘에 대한 유비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이 같은 연결이 보다 널리 확대되고 또 활성화될 때, 지금의 기후위기를 초래하고 가속화한 본질적이고도 거대한 구조적 흐름인 산업화, 자본주의, 추출주의, 식민주의, 종차별주의, 비장애중심주의, 타자화 등에 대한 대대적인 문제제기와 대항운동 또한 너무 늦지 않은 때에 본격화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후위기 앞에서 연결을 재생산하기’는 창작자들이나 예술가들만의 일이 되어선 안 될 것이었다. 더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자리를 조금씩 움직여 어깨를 연결하고 입 모양을 맞추어 이 위기에 대해 공동으로 전하고 행위하고 증언하고 선언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릴레이처럼 연결은 이어지고 증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힘입어, 우리는 선창을 하듯 함께 서두에 소개한 선언문을 작성했다. 2기를 끝내고 3기 모집을 앞둔 시점이었다.



기후위기 앞에서 목소리로, 춤으로, 걸음으로 연결들을 증식시키기


이 시기는 3년 만에 재개되는 대대적인 9월 기후 시민행동을 앞둔 때이기도 했다. 1기와 2기를 함께 꾸려오면서 대외활동에 대한 구상을 해나가기 시작했던 몇몇이 뜻을 모았다. 처음으로 “Climate Performer”라는 아이디의 공식 SNS 계정을 등록하고 프로필 이미지도 만들었다. 그리고 3기 모집 공지를 통해, 이 행동에 창작자들이 중요한 시민 주체로서 힘을 싣기로 한다는 뜻을 전했다. 선언문의 취지와 방향에 동의하면서 924 기후정의행진을 위한 활동에 함께할 창작자들을 불러 모았다. 며칠 사이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틈새를 들여다보며 시로써 증언하고, 작고 희미한 것들을 초대해 이야기와 영상을 만들고, 사진으로 비인간동물의 얼굴을 담아내고, 섬세하고 힘센 언어로 비평을 쓰고, 다친 자리를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 3기를 구성했다. 우리는 처음 오프라인으로 만났고 새로 합류한 이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OT를 진행했다. 낯선 얼굴들이 오래 알아왔던 것처럼 서로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새로운 연결 앞에서, 시작하는 마음을 나누었다.


그림 설명 시작. 기후정의 오픈마이크 행사에서 사람들이 한 발언자의 말을 듣고 있다. 그림 설명 끝.


3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실행한 기획은 ‘기후정의 오픈마이크’였다. 924 기후정의행진 조직위원회 회원이기도 했던 우리가 행진의 불씨를 놓고자 했던 첫 행사였다. 마이크 앞에 누구나 나와서 증언과 낭독, 노래와 춤과 퍼포먼스로 기후정의의 목소리를 들려달라 요청하는 열린 무대였다. 이는 늘 마이크를 쥐던, 높고 탄탄한 자리에서 주목받고 인정받는 이들에게서 마이크를 찾아와 더 넓고 평평하고 둥근 자리에서 마이크를 나누는 기획이기도 했다. 누구는 내내 말하고 누구는 내내 듣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어깨동무를 하듯 평등한 자리에서, 말하는 동시에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어보는 일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 지금의 기후위기를 낳은, 경쟁과 착취와 차별과 배제가 기본값이 된 사회를 의심하는 생생한 몸의 경험을 서로에게 안기는 일이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많은 이들이 마이크 앞에서 자신과 이웃의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파르르 떨거나, 속삭이듯 말하거나, 별일 아닌 듯 노래하고, 왈칵 울음을 쏟아냈다. 


그림 설명 시작. ‘퇴비들의 행진’ 리허설에서 글자들이 빼곡히 쓰인 화선지들을 구긴 다음 이를 낭송하고 있다. 그림 설명 끝.


3기 활동 중 가장 깊이 공들여 준비한 것은 ‘퇴비들의 행진’ 퍼포먼스였다. 924 기후정의행진 당일의 무대를 위한 준비였다. 창작자들은 이를 위해 시와 소설을 쓰고 번역했으며 커다란 화선지 위에다 글자들을 빼곡하게 써 넣었다. 기후재난 앞에서 죽임당하는 도처의 삶, 이 사회의 숱한 위기와 위험과 가난과 억압의 삶을 불러와 말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서로에게 연결되고 연루되어 있음을 ‘퇴비 되기’라는 상상력으로써 환기시키는 작업이었다. 본격적인 행진을 앞두고 열린 오픈마이크 무대에서, 우리는 차례차례 화선지를 펄럭이며 작품을 읽어 내려갔다. 앞서 읽은 이는 무대에 서서 다음 사람이 다 읽기를 기다려주었다. 퍼포먼스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둥근 대형으로 섰다. 구겨진 화선지를 다시 펼쳐 들고서 잘 보이지 않는 서로의 글자들을, 한 번도 맞춰보지 않아 자꾸 틀리는 합창처럼 낭송했다. 낭송이 끝난 뒤에는 손을 잡고 빙빙 돌았다. 자꾸 틀리고 조금도 일치되지 않는 소리였음에도 그것은 합창이었고 손잡기였다. 924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해 함께 걷고 함께 거리에 드러누운 3만 5천 명 또한 합창과 손잡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연결되어 ‘이대로 살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은 몸들을, 삶을, 생명을 지우려 하는 그 지도 위에 합창과 손잡기와 모인 목소리와 곁에 서는 일로써 새로운 바탕색을 칠하고 다르게 선을 긋는 일을 하려고 한다. 이미 그 일을 하고 있거나 상상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런 마음으로 우리는 12월, 홍지연 작가의 <가장 높은 곳에 사는 남자는 가장 먼저 비를 맞는다>의 연계 퍼포먼스인 ‘움직이는 증언’으로 4기 활동을 재개했다. 지금은 4기의 활동 방향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궁리하고 이야기하는 과정을 지나고 있다. 우리의 근미래이기도 한 4기 활동에 대한 소개를 빼놓기가 아쉬워, 이를 상상하게 하는 각각의 목소리를 초대했다. 뜨겁게 읽어주기를.


희음 기후위기는 삶의 위기다. 많은 이들의 삶이 이미 위태로우며 이미 숱한 차별과 억압 속에 있지만, 기후위기는 그 삶을 더 험한 곳으로 밀어 넣고 있다. 하지만 한쪽에서 “이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할 때 다른 한쪽에서는 “가만있으라” 말한다. 나는 이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이며, 이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서 있고 싶은 사람이다. 함께 더 꼿꼿이 서서 어디로든 나아가는 방법이 무엇일지, 이때 창작과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일단은 비슷한 뜻을 가진 창작자들이 만나고 모이고 이야기하고 작당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로 시와 비평에세이를 비롯한 온갖 잡다한 글을 쓰지만, 예술 안에 있는 많은 장르적 실천들과 손잡고서 저항하며 나아가고 싶었다.


연정 언젠가부터 나는 내 주변에 있는 상냥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을 동경했다. 그래서 그들의 대해 생각하고 그들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합리한 것에 대항하며 작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목소리를 내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경험했다. 기후위기 의제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사회문제 여기저기 광범위하게 걸쳐 있고, 접할 수 있는 난이도가 쉬운 편에 속한다. 기후위기, 당연히 해결돼야 한다고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의 바람과 다르게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의문이 들었다. 기후위기로 인한 불합리는 우리에게 너무나 깊이 체화되어 크게 인지하지 않을 뿐, 이미 많이 알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워. 이걸 혼자서 어떻게 풀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동체를 찾았다. 나와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창작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서 생각과 격려, 힘과 비판을 공유하고 싶었다. 


진송 기후위기는 우리 삶 근처에 성큼 다가서 있다. 홍수, 태풍, 이상기온으로 계절과 날이 바뀔 때마다, 매 순간마다 기후위기를 인식할 수 있을 기회와 정보가 제공되지만 어쩐지 위기를 위기로, 재난을 재난으로 받아들이는 공통감각은 도무지 생겨나지 않는 것 같다. 도저히 외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명백한 진실, 숨을 쉬며 대지에 몸을 디딘 채 존재하는 모두에게 부대껴오는 변화들을 느끼고, 해석하고, 재현하고, 표현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기후재난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심지어는 모든 일들이 나쁜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할지라도 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 갑작스럽게도 그게 예술이고 예술적 방식의 저항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을 그저 살아가는 것처럼. 그것밖에 쥐어본 적이 없는 내 손에 쥐어진 예술과 실천은 어느새 그런 것이 되었다.


윤은성 기후위기 문제를 마주한 단 하나의 경로를 꼽기는 나로서는 어려울 것 같다. 여러 경로에서 나는 폭력의 문제를 직면했고, 사회적인 나의 위치가 강자의 자리에 걸쳐 있다는 것을 쓰라리게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폭력의 문제는 계급, 젠더, 인권, 동물권 등 전 범위에서 교차하는 나의 위치에 대해,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직면할 수 있는 감수성을 함께 나누는 세밀한 작업을 창작으로서 시도해볼 수 있고 또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같은 생각을 격려해주고, 함께 힘을 모으자고 말하는 동료들이 있다는 것을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모임을 통해 언제나 확인하고 힘과 위로를 얻는다. 나는 시 창작을 통해 폭력 앞에 서서 반응할 수 있는 특정한 감수성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싶다. 그것이 기후위기라는 초유의 상황에 대한 나의 가장 효율적이고 따뜻한 대응 방식이자 연대 방식 중 하나이다.


혜수 언젠가부터 나는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들을 보면서 “이 전시가 끝나면 저 작품들은 다 어디로 가지?”였다. 이러한 태도는 미술을 하는 창작자로서 전시가 끝난 뒤 공간을 차지하는 작품들 대부분이 버려져야 한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작품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전시를 위해 일회성으로 쓰이는 디지털 기기들과 나무, 페인트, 비닐 외 온갖 비재활용품이 쓰인다. 물론 작품을 판매할 경우도 있지만 이런 일은 계급/제도화된 미술 시장 안에서 극히 소수의 “작가”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고, 최근 과열된 NFT에서 거래되는 미술품 또한 엄청난 탄소발자국을 남기기 때문에 자본/비물체가 된다고 해서 공간을 차지하고 자원에 의지하는 예술품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창작자로서 무엇을 창작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창작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게 과연 윤리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가장 최소한의 소비/착취/축적으로 할 수 있는 예술은 무엇일까?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 속에서 나는 행위자로서의 예술, 행위를 하는 “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몸”은 땅을 밟고 서 있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이지만, 인종, 국가, 계급, 젠더, 정상과 비정상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모든 “몸”들은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상호의존적이지만, 인간/가부장/이성애/비장애중심주의 사회에서 특정한 “몸”들만이 가시화되고 정상화되고 살아남는다. 기후위기 시대에 이러한 몸에 대한 차별, 종에 대한 차별은 더없이 폭력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유화되는 정보와 과학기술이 점점 예술을 대체하는 이 시점에서 예술의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슨 음식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어떤 창작을 한다는 것은 결국 나의 “몸”을 결정하는 주체적인 일이며, 연결된 다른 “몸”들을 돌보는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과 함께 쓴 선언문에 이러한 고민들이 담겨 있다. 다양한 “몸”들을 존중하고 다른 “종”들과의 연대를 꿈꾸는 만남, 이러한 행위를 전시(exhibition)하는 것이 아니라 공거(cohabitation)하는 것이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로서 할 수 있는 예술이지 않을까?


홍지연 2021년 가을 시작된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1기부터 현재의 4기까지 함께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기후위기란 나에게 막연한 문제로 다가왔다. 기이한 변화를 겪고, 많은 것이 무너지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 대해 공부를 하고, 동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감수성을 쌓아 갈수록 기후위기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금 당장의 문제임을 체감하게 되었고, 더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고, 참담한 현실 앞에 설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작년 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빗줄기는 많은 이들의 삶을 무너뜨렸고, 폭우로 인한 피해를 입은 이들은 대부분은 장애인, 노인, 주거 취약계층 등 사회적 약자였다. 집과 살림살이가 모두 비에 젖어 못 쓰게 되어도 그저 목숨을 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강남 지역의 어느 종류의 자동차가 물에 잠겼다는 소식은 흔하게 들려왔지만, 폭우 참사로 희생된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목소리는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기온이 오르는 것, 날씨가 급변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 전반적인 불평등에 대한 문제임을 느꼈다.


지금 당장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인 창작자로서 어떻게 문제를 마주할지 고민이 되었고,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기후위기’라는 문제 앞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는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의 동료들과 함께여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활동을 하면서 각자 다른 감수성을 가진 ‘우리’가 서로의 여분을 채워가며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경험했고, 이는 정말 따뜻하고 강한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많은 이들을 더 넓은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활동을 이어나갈 것이다.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 climateperformer@gmail.com

정리와 기록: 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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