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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집은 성수동이다

[특집 '빈곤' 여는 글]  편집위원 유리


나의 집은 성수동이다. 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이렇게밖에 시작하지 못한다. 나는 2000년 성수동에서 태어났고 그 뒤로 서울의 동쪽에서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사는 동네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성수동은 여전히 내가 고향으로 느끼는 유일한 공간이다. 성수동은 조부모가 당신들의 자식인 나의 아버지를 키운 곳이고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성수동에 산다.


실상이 어떠하든 나는 2005년을 어떤 원흉의 기점으로 기억한다. 그 해는 서울숲이 처음 개장한 연도이기 때문이다. 동네에 서울숲이 생기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성수동은 곧 살기 좋은 동네가 되어버렸다.


살기 좋은 동네는 거리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고 한낮부터 노상에서 소주를 까는 사람들, 노점상인, 시장 상인, 일용직 노동자, 공업소 주인, 양아치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살기 좋은 동네는 거리에서 아무렇게나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해 뜰 때 일을 나가며 언뜻 봐도 매끈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에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더 이상 이곳에 살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동네가 살기 좋다는 게 영영 비밀이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해야했다. 내가 이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던 가능성이 고작 조합원들 간의 갈등으로 인한 개발의 지연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서울숲이 개장한 지 얼마 안 되어 시작된 뉴타운개발정책으로 동네는 10년 넘게 어수선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2007년은 뉴타운개발정책이 정점을 찍던 해였다. 그때부터 동네에 굴삭기 소리가 멈춘 적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10분 걸어가면 영동대교를 기준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자양동이 나온다. 이곳은 5년 전까지 자양 3구역 철거대책위원회가 꾸려졌던 곳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올 때 페인트를 산 철물점이 있었던 곳이다.  다시 서쪽으로 10분 걸어가면 성수 1구역이 나온다. 이미 15년 전 다 부서진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이제 한국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로 손가락 안에 드는 트리마제가 서 있다. 여전히 버스 두 대도 한 번에 지나가지 못하는 뚝섬구 길이지만 트리마제 앞만은 다 밀어버린 땅 위에 갑자기 인도와 4차선 도로가 생겼다.


한국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 트리마제가 있는 자리는 우리 아빠의 오랜 친구가 슈퍼마켙을 하던 자리였다.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아빠를 따라 아저씨네 가게를 종종 갔었고 먹고 싶은 사탕을 뚫어져라 쳐다보면 아저씨가 허허 웃으며 그 사탕을 내게 건넸다. 아저씨는 자신의 가게였기에 ‘적절한’ 보상을 받고 10년 전 이주를 했다. 그렇지만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적절한 보상을 받았든 말든 그 자리에 있던 성수 토박이와 뜨내기들은 어차피 새로 세워진 그 집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성수에 살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트리마제가 올라가기 전 가림벽 위에 빨간색 페인트로 ‘이명박 개새끼’, ‘죽어라’, ‘시발 놈’, ‘오세훈 ㅗ’ 이런 말들을 갈겨놨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놈 소리를 듣는다.


젊었던 이모가 밤늦게 퇴근을 할 때 어쩐지 무서워 고개 숙여 빨리 뛰어다녔다는 성수역 인근 공장지대는 카페 거리가 되었다. 공장에서 자란 엄마와 이모는 옛 공장 건물에서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어 한다. 나는 또 우리 집 앞에 있는 오래된 이용원이 어떤 감성이 되어 잡지에 실린 모습을 본다. 국제 도서전에서 우연히 펼친 그 잡지 속에 나온 우리 집 앞 풍경을 보고 나는 왠지 모를 수치감을 느꼈다.


지난 주말에는 20년 동안 우리 집 앞에서 장사했던 백반집이 문을 닫았다. 건물주가 들어올 거라고 한다. 권리금은 커녕 인테리어 비용을 물고 쫓겨나는 것이라고 한다. 20년 동안 들른 단골들은 사장님을 붙잡고 같이 건물주 욕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나는 속이 메스꺼웠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돼지갈비를 입에 욱여 넣기를 멈출 수 없었다. 그 백반집은 매일 이어지는 성수의 공사장에서 일하는 건설노동자들의 함바집 역할을 했었다. 오늘 아침 학교를 가며 그 건설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밥을 먹던 가게를 부수는 모습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아득하다.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은 없어진다. 내가 쓸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새로 세워진 성곽에 나의 몫은 전혀 없다. 어릴 적 보았던, 동네 정자에서 소주를 까던 중학생 언니 오빠들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편집위원 유리 | 7191zer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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