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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 편집장 해진 


그렇게 슬프지 않았습니다.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폭우가 내리던 날 어느 지하차도에서 40여 명의 사람이 익사했다는, 부임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교에서 스스로 죽기를 결정했다는, 한 노동자가 신축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추락사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눈물이 나거나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 문단에는 은유나 함의, 반어법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몇 년 전의 저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에 슬퍼하지 못하며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못합니다. 이제 ‘PC’한 이야기에는 질렸습니다. 벅차오르게 하는 문장도 글도 싫습니다. 건조한 글이 좋습니다. 그래서 갈 곳을 잃었습니다.

 

많은 원인을 꼽을 수 있을 듯합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서, 사람을 감정적으로 지치게 하는 사건과 사고들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그것들이 뉴스로 너무 많이 보도되어서, 고대문화에서 활동을 해서, 혹은 제가 그냥 생각이 짧아서, 반골이어서, 이런 일들에 질려버려서, 쉽게 울거나 화내지 않는 게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느껴버려서 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중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 그것을 해결하고 다시 저를 감정적으로 ‘활성화’하는 일은 제가 원하지 않습니다. 울다 잠들던 날보다는 지금이 훨씬 평안하며, 또 특정한 무엇을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저는 여성,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비인간 동물, … 들의 문제에 슬퍼하지 않거나 이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을 멍청하고 시대착오적인 사람들이라 여기지도 않습니다. (약간은 합니다) 스스로가 그들과 어떤 의미에서 비슷한 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들’이 ‘우리’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저 이해하지 못할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공감과 특정한 감정은 힘과 의지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변화와 설득은 어떻게 가능하며, 세계는 어떻게 변혁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 저와 세계의 모습을 비난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겠다는 결정은 무엇으로 이어질까요. 이곳에 쓰인 문장들로 미루어 보아 저는 변화와 설득의 가능성을 회의하게 된 까요.


입장을 완결 지어 ‘편집실에서’의 마지막 문단으로 쓰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을 콕 집어서 탓할 수 없다는 건 거꾸로 모두에게 탓이 있으며 무한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을 적어 두고자 합니다. 가령 저는 제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에 저도 분명 기여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것을 믿습니다.


희망과는 상관없이, 어떤 힘을 내보자면 ― 저는 우리의 세계를 이루는 무한한 것들이 우리를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하게 만든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상태로 존재하는 것만으로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와 세계가 어떻게 변혁되는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어떤 상태로든 존재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변화와 설득이라고 느낍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연루된 채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조건이자 책임인 것 같습니다.



편집장 해진 | jnnnter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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