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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에서

[편집실에서] 편집장 하영

저는 무언가에 이름 붙이기를 참 좋아합니다. 처음으로 뽑기에 성공한 인형, 언제나 집 앞에 서 있는 나무, 잘 키워보라고 선물 받은 다육이 따위의 것들을 위해 항상 고심하여 이름을 정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더라도 이름을 부르면 어쩐지 서로 간의 비밀스러운 약속이 생긴 것 같아 기쁩니다. 그렇게 이름을 부른 모든 것들 중 가장 애정하는 건 집 앞에 우뚝 서 있는 ‘나무’입니다. 어떤 고양이— 동네 아이들에게 ‘모모’라고 불린가 늘 앉아 있던 한 나무를 유난히 좋아한 어린아이는 할머니에게 “이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건 나무야”라고 답했습니다. 아이는 그의 이름이 ‘나무’인 줄로만 알고 아낌없이 이름을 부르며 껴안았습니다. 하지만 끝내 시간이 아이와 ‘나무’를 관통하는 동안, 아이는 ‘나무’를 점점 잊었습니다.


남산에 곤돌라를 설치하기 위해 잘려 나갈 나무들. 매년 불꽃놀이에 죽어 가는 새들. 하얗게 질려가는 산호초.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동물. 그 모든 존재들의 죽음 위에서 살아가는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를 생각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지구의 시간도 떠올립니다. 어느 날부터 저는 제 미래를 쉬이 상상하지 못합니다. 머지않은 미래에 순식간에 지구가 불타오르고, 꿈과 희망이 함께 소멸할 것만 같습니다. 가끔은 차라리 종말이 모든 걸 휩쓸어주길 기대합니다. 다만 종말은 그리 편하고 빠르게 세계를 휩쓸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고약한 심보를 꾹 삼킵니다. 


여름의 고창에서, 마을 사람들과 풍물을 치며 흥겹게 노는 백발의 어르신들을 보며 문득 ‘나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동시에 내가 할머니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존재들에게 해를 끼칠지 두려워졌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어딘가에 살며 무언가를 입고 먹어야 하기에 ‘무해함’이 얼마나 공허한 환상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나무’와 나무들을, 숲을, 바다를, 어딘가의 존재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무수한 존재들에게 해로울 우리의 생이 그럼에도 이어지길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다른 이들도 나의 세상을 함께 사랑해 주길 욕망합니다. 마치 그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랑하던 ‘나무’를 시간 속에서 속절없이 잊은 한 사람의 마음만으로 숲과 나무를 구할 수 없듯,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것만으로 이 세상을 지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사랑이 데려올 슬픔을 믿습니다. 베어지는 나무를 보며 그 어린 시절 속 ‘나무’를 떠올리는 슬픔을. 유리창에 부딪히는 새를 보며 계절을 노래하는 지저귐을 떠올리는 슬픔을. 고기가 되는 존재를 보며 벗이 되어준 반려동물을 떠올리는 슬픔을. 그 모든 슬픔이 끝끝내 붙잡을 우리의 생을. 


참으로 못난 세상입니다. 너무도 많은 존재가 죽고 다치며, 우리는 그 죽음 위를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아름답고 무해한 세상은 결코 존재한 적도, 존재할 수도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있는 힘껏 이 못생긴 세상을 슬퍼하기로 했습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되어도, 혹은 될 수 없어도 결국 저는 슬퍼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슬픔을 껴안아 다른 존재를 만나려 애쓰고, 못난 세계를 기록하고, 조금이나마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나의 생이 떠도는 모든 것들에게, 머무는 모든 것들에게 닿을 수 있길 소원하며.  


편집장 하영 | choibook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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