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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청년 담론의 실종?

[특집 '청년' 여는 글] 편집위원 윤석

남한의 청년 담론은 실종되었는가? 2007년 『88만원 세대』 출판부터 약 15년, 청년 담론은 남한의 정치 담론에서 급격히 논의가 중단되었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2002년 이후 최초로 수권 집단을 표방하는 어떠한 정치 세력도 자신이 청년의 편에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방하려 하지 않은 선거였다(김선기 2024)[1]. 진보-보수 양편에서 청년정치를 표방하던 정치인들은 급격히 수그러들었다. 4년 전 정의당의 청년 정치인을 표방하던 이들은 어느덧 제22대 총선 제3지대 정계 개편 논의에 휘말려 사라졌다. 청년의 이름으로 능력주의 정치를 내세우며 2021년 국민의힘 대표로 선출된 이준석은 그가 그토록 비난하던 기성 정치인들처럼 화성을 선거구의 동탄신도시 주민들을 돌아다니며 이제까지 입에 담던 청년정치를 지워버렸다. 제도권 정치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층위의 공론에서도 청년 담론은 붕괴되었다. 청년 세대 규정의 가장 얄팍한 최신본인 MZ세대론은 1981년생부터 2010년생까지 30년의 인구 집단을 포함한다.[2] 이 성의 없는 세대 규정에 의하면 부모와 자녀는 한 세대에 묶일 수 있다. 그나마 의미를 찾아보자면 MZ세대는 저출생 기조를 고려할 때 남한에서는 사실상 ‘세대’라고 불릴 만 한 유의미한 세력을 이루는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뿐이다. 2024년 현재, 적어도 청년을 한 사회 세대 문제의 당사자로 주제화할 청년 담론은, 약 3년만에 갑작스럽게 와해되었다.


그러나 와해된 기존의 청년 담론에 내재한 균열들을 감안하면, 청년 담론의 와해는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대체 ‘청년 문제’란 무엇인가? 시대의 고유한 문제인가? 한 세대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저 청춘의 성장통이요, 풋내 나는 통과 의례인가?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청년 담론은 당대의 청년 세대 문제를 시대나 연령의 문제로, 혹은 세대 고유의 문제로 각기 다르게 정의했다. 세대를 규정하는 방식들 중, 실증주의적 세대론은 생물학적 연령과 출생 년도로 한 세대를 정의한다. UN(19-24세)이나 남한(19-35세)의 청년 규정이 이에 속한다. 반면 낭만주의적 세대론은 단선적 시간을 넘어 동일한 사건을 경험함으로써 그 세대가 구성된다고 말한다. 경험적 연구에 있어 실증주의적 세대론은 시대와 연령으로 대변된다. 낭만주의적 세대론이 경험 연구에 적용된다면, 같은 생년으로서 같은 나이에 같은 경험을 한 코호트{cohort}에 비견될 수 있을 것 같다. 기존의 청년 담론들은 시대, 연령, 코호트의 세 효과를 청년이라는 기표 하에 동일선상에서 논해 왔다. 요컨대, 청년 문제를 시대적 배경 속에서 분석하려는 시도들과 청년 담론의 열풍을 빌어 청년 문제를 청춘의 성장통으로 규정하려는 시도들, 나아가 청년을 한 세대로 보고 그 내적 특징을 찾으려는 시도들이 모두 ‘청년 담론’ 이라는 이름으로 논해졌다. 그럼에도 21세기 전반부 남한 청년 담론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청년을 주체성이 탈각된 무기력한 대상으로 규정한다는 데에 있다.


이 시대 청년 담론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88만원 세대』는 청년을 연애 · 결혼 · 출산을 포기한 세대, ‘삼포세대’로 규정한다.[3] 88만원 세대론은 청년을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의 무기력한 희생자로 묘사하며, 청년의 무기력증을 기성세대, 이른바 86세대가 할 수 있었던 적극적 사회 참여에서 청년을 몰아내는 무한 경쟁의 문제로 돌렸다. 그 전까지 동아시아적 청년{靑年}은 근대적 조어로서 민족과 사회의 진보를 이끄는 주체로 규정되었다.[4] 남한의 항의운동 전통 또한 청년을 변혁의 선도자로 규정한다. 4·19까지는 고교생, 그리고 이후부터 대학생은 교육 사다리의 정점에 선 미래의 엘리트로 그려져, 국가적 근대화 기획에서 그 방향성을 대변할 수 있는 계층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상시화된 고용 불안에 적응해야 하는 청년은 더이상 이전까지 기대되었던 변혁의 선도자 역할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 청년 담론을 대표한다고 주목받은[5] 옥상달빛의 노래 〈수고했어, 오늘도〉(2011)[6]는 청년의 아픔을 슬픔으로 포착하고 응원을 던진다. 청년은 이제 분노하는 대신 ‘토닥토닥’ 위로를 바란다. 같은 시기 ‘힐링’을 키워드로 삼은 ‘멘토’들의 자기계발서들이 쏟아졌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청년의 문제를 시작하는 존재이기에 겪는 아픔으로 규정하고 ‘그대는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답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는 ‘위로와 치유의 잠언’을 자칭하며 청년의 문제를 ‘마음 다시 보기’로 돌린다. 청년 담론은 힐링 멘토들을 앞세운 안철수의 ‘새정치’로 결집되어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 체계의 한 주제로 재출발했다. 이는 시대의 선도자 청년{靑年}과는 거리가 먼 출발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조에 대한 비판 대신 긍정의 언어로 포장한 격려로 청년을 호명하는, 다분히 단절적인 출발이기도 했다.[7]


이 새로운 ‘청년’을 오찬호(2012)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적 주체로 개념화한다. 신자유주의 노동 체제는 노동 불안정을 핵심 기제로 삼는 동시에 노동자들에게 자기 경영적 시간 관리를 통해 개인적으로 이를 극복할 것을 요구하고, 노동자들은 불안정의 근원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 대신 내부로 투사하여 자기계발을 규범화하고 이를 타인에 대한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오찬호는 청년 문제를 고용 불안정을 전제로 수능과 학벌 체제로의 편입을 겪은 세대의 문제로 새롭게 정의한다. 청년 세대는 노력에 근거해 비정규직 차별을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학벌 위계에 끼워넣어 하위 학벌을 무시하고 상위 학벌을 숭상한다. 이 세대론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류의 자기계발서를 구조에 대한 불만을 잠식시키고 순응하게 부추긴다고 비판한다.[8]


청년 담론은 이처럼 고용 불안정 속 무기력해진 청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적 노동 규범에 체념하는 세대를 일으켜 깨워 청년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와, 개인적 생애 과정 속 문제로 청년 문제를 치환해 투사적 청년 상과 단절하려는 시도, 두 축 간의 대립을 내포했다. 한쪽에서는 청년들에게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투쟁의 ‘짱돌’을 들고 싸울 것을 촉구했다(우석훈, 2009). 다른 한쪽은 청년을 중장년층과 대립시키며 기성세대의 위선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증거물 삼아 구조 담론을 세대 간 투쟁으로 축소시켰다(이광석 · 윤자형,  2018).[9] 청년 담론을 둘러싼 핵심 논점은 고용 불안정 체제를 수용하는 자세와 방식에 있었다.


‘공정’은 청년 담론의 이념적 주도권을 얻기 위한 핵심 기표가 되었다. 공정은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캠프의 핵심 기치로 제시되었고 2019년 조국 사태에서 86세대의 ‘위선’의 대립항으로 새롭게 재편되었다. 특히 공정 담론은 2010년대 중후반 이후 남한의 젠더 담론과 — 그 질{質}이 어찌 되었든 담론은 담론이다 — 맞물리는데, 청년 세대론에서 이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제시되고  『일베의 사상』(박가분 2013), 『보통 일베들의 시대』(김학준 2022)[10]로 이어진 ‘차별의 정당화’에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청년 담론의 막바지인 2020년대 초반, 청년은 공정과 젠더의 주제와 함께 호명되었다. 제도 정치에서 공정 담론은 세대와 젠더를 갈라쳐 혐오할 이유를 찾아내는 이준석 류의 트럼피즘의 동력으로 사용되었다. 이에 맞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청년 여성 정치인들은 공정 담론을 역시 여성 및 소수자의 입장에서 전유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청년 담론은 박지현-이준석을 필두로 한 양당 정치인의 첨예한 갈등으로 대변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청년 담론의 한 시대는 이렇게 저물었다. 2022년 1월 13일, 청년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2024년 8월 현재 기준 청년기본법의 마지막 개정 시점은 2023년 9월 22일, 이미 청년 담론이 소강 상태에 들어선 시점이다.


청년 담론은 여전히 유의미한 담론인가? 청년 담론에 대한 수많은 공격 끝에 이제는 청년 담론 자체의 의의가 의심받기도 한다. ‘시간 지나면 다 해결된다’, 혹은 ‘나이 먹으면 다 해결된다’로 요약되는 이 의심은 세대론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시대 효과와 연령 효과만이 존재할 뿐 코호트 효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지금까지의 세대론 비판의 논점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 하며, 청년의 문제는 그저 그 나이에 다 겪을 문제라고 악의로 가득차 넘겨짚는 점에서 자기위로성 청년 담론의 아류에 불과할 뿐이다. 2011년 KGSS 조사와 2022년 한국갤럽·데이터스프링코리아 조사에서 서로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남한 청년 세대의 코호트 효과는 실증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11] 무기력한 존재로 치부되건 사회 변혁의 담지자로 지목되건, 청년 세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실종 이전까지 남한 청년 담론들에 대한 비판들은 청년이 세대로서 동질화될 수 없는 단위임에 주목한다. 『청년 팔이 사회』 는 세대가 동질성을 보장하기에 너무 큰 집단임을 지적하며 청년이 담론 경쟁의 기호로 쓰인다고 비판한다(김선기 2019). 2021년 한겨레 경제사회 연구원 ‘청년담론’ 화상 토론회는 청년 담론이 세대주의로 환원되어 구색 맞추기에 동원되고 있다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 세대는 없다』 는 세대 간 갈등에서 벗어나 세대 내 불평등을 지적하며, 세대 집단 간의 투쟁이라는 허구적 세대론을 대중 매체가 부추기고 있다고 비판한다(신진욱 2022).


오늘날 청년 담론을 다시 논해야 한다면, “세대별로 각기 다른 청년들이 서로 분절된 문제와 자원을 갖고 상호작용하며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1920년대 칼 만하임은 세대가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된다며, 세대 내 사회적 위치의 특수성과 사회 내 위치 관계의 종합을 통해 세대의 지형이 만들어짐을 역설했다. 한 세대위치 내에 여러 세대 단위가 존재하고, 이들 단위를 기성 세대의 ‘선구자’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얻은 ‘구체 집단’이 통합하여 세대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만하임 2020). 만하임의 이러한 사회 운동적 세대론은 68혁명의 대학생의 자기 규정에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유라이트·빌트·부데 外, 2014). 기실 『세대 문제』의 한국어 초판 번역은 청년 담론이 한창이던 2013년에 이루어졌고, 만하임의 세대 담론에 대한 연구서 또한 그 다음 해인 2014년에 번역되었다. 사회 운동적 세대론이 남한 청년 담론에 명확히 도입되지 못한 상황에서, 흥미롭게도 2024년 현재로부터 십여 년 전에 이미 청년 담론의 또다른 가능성이 슬며시 소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청년 담론을 다시 시작할 열쇠는 이미 주어진 셈이다.


다시 한 번, 청년 담론은 실종되었는가? 청년 담론 열풍의 급격한 소강은 지금까지의 비판에서 제기된 내적 난점들의 축적때문인가? 아니면 정치적 개편의 결과에 불과한가? 한 가지는 분명한 바, ‘청년 담론 붐’은 실종되었지만, 그 배경이 되었던 신자유주의 불안정 노동 체제와 자기 계발 주체에의 요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청년이 존재한다고 꼭 청년 담론까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담론의 주제 의식을 구성했던 문제가 남아 있다면 담론은 여전히 필요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청년 담론은 소멸한 것이 아니라 실종되었을 뿐이다.


편집위원 윤석 I jeongyunseok@jinbo.net


[1] 청년 담론 실종사건 (2024.01.15.). 대학신문.

[2] 김난도 외 (2019). 트렌드 코리아.

[3] 우석훈 · 박권일 (2007). 88만원 세대.

[4] 안확 (1921). 2.

[5] 김정위. KMA 2011 올해의 신인. 옥상달빛 — 한국대중음악시상식. 

[6] 옥상달빛 (2011). "수고했어, 오늘도". 옥상달빛 1집 28.

[7] 옥상달빛은 「수고했어, 오늘도」로부터 불과 4년 뒤 「희한한 시대」(2015)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레퍼런스 삼고 “눈 뜨고 잘 듣고 목소릴 내보면 / 그럼 지금보다 나아지겠지”라고 노래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옥상달빛, 2015. 〈희한한 시대〉 『희한한 시대』 매직스트로베리 사운드.

[8]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2012년 출간 당시 사재기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오찬호의 비판 이전부터 이 논란이 단지 출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혜민의 논지 자체가 종교의 권위를 위로를 포장해 문제를 회피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차보람 (2012). 혜민 비판.

[9] 이광석·윤자형 (2018). 77-127.

[10] 이 책이 김학준(2014)의 석사 논문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을 풀어서 쓴 것임을 감안할 때, 오늘날의 혐오 세대론은 이미 2010년대 초중반에 그 맹아가 완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 두 얼굴의 공정 (2022) 경향신문.


참고문헌


단행본

김난도 외 (2019) 트렌드 코리아 2019. 미래의창.

김학준 (2022). 보통 일베들의 시대. 오월의봄.

박가분 (2013). 일베의 사상. 오월의봄.

신진욱 (2022). 그런 세대는 없다. 개마고원.

우석훈, 박권일 (2007). 88만원 세대. 레디앙.

우석훈 (2009).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레디앙.

울리케 유라이트, 미하엘 빌트, 하인츠 부데 외 (2014). 세대란 무엇인가? : 카를 만하임 이후 세대담론의 주제들. 한독젠더문화연구회 譯.

칼 만하임 (2020) 세대 문제. 이남석 譯.


논문

김학준 (2014).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저장소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석사학위논문.

안확 (1921). “3중위협과 자각”. 아성 1(3) 2.

이광석, 윤자형 (2018). 청년 대중서로 본 동시대 청년 담론의 전개 양상. 언론과 사회 26(2). 77–127.


온라인 기사

김선기 (2024.03.31). “청년 담론 실종사건”. 대학신문. Retrieved from

https://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017

이혜리, 유선희 (2022 연작 기사). 두 얼굴의 공정. 경향신문. Retrieved from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s339


기타

<2021 아시아미래포럼> 청년포럼/ 청년들이 만드는 균열, 연결, 그리고 상상력. Retrieved from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14946.html

김정위. 옥상달빛 — 한국대중음악시상식. KMA 2011 올해의 신인. Retrived from https://koreanmusicawards.com/project/옥상달빛

옥상달빛, 2011.〈수고했어, 오늘도〉 『옥상달빛 1집 28』 미러볼뮤직.

옥상달빛, 2015. 〈희한한 시대〉 『희한한 시대』 매직스트로베리 사운드.

차보람. (2012.11.3.). 혜민 비판 [facebook 글의 tistory 재인용]. Retrived from: https://viamedia.tistory.com/entry/옮김-혜민비판-차보람요한신부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청년담론’ 화상 토론회. Retrieved from:
http://www.asiafutureforum.org/2021/ko_board/bbs_view.php?idx=1190&bbs=material&q_cd_site=1&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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