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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노벨상 수상

[시선] 편집위원 서연




소년은 오고 있는가.


2024년 10월 10일,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생애의 유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을 쓴 한국의 작가 한강을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1]”고 밝혔다. 문학으로 죽음을 밝히는 것은 살아 있는 우리를 밝히는 일과 같다. 고통에 깃든 생명을 발견하는 글쓰기를 시대가 부르고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이 윤석열 정부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준다. 한강이 말했듯 우리는 세계에게, 그리고 세계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간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성은 아름다움보다 비열함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비열함으로 누군가를 혐오하고 짓밟으며 권세를 키운 윤석열과 타자의 고통과 사랑으로 글쓰기를 지속해 온 한강이라는 인물이 교차하며 대비감을 선사한다.


계엄군의 총칼에 으스러졌던 소년과 사람들에 대해 쓴 글이 세계에 알려진 겨울, 우리는 또다시 계엄을 맞이했다. 잔혹한 역사의 한가운데에 또 소년이 서 있는 것만 같다. 우리는 한강의 글을 읽으며, 고통을 마주했고, 아마 고통과 ‘작별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가.


한강은 자신의 생명으로 소년을 우리에게 데려왔다. 지난한 질문의 끝에서, 한강은 그것이 그저 자신이 고른, 정답이 아닌 ‘끝’이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끝은 무엇인가. 광주에서 5·18 정신을 희롱하는 집회가 열렸을 때, 극우와 극좌의 대립일 뿐이라 일축하고, 눈앞의 실정에 대학생인 우리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당신이 찾은 ‘끝’이라면, 당신에게 소년은 닿지 않았다.


우리는 소년이 숨 쉬었던 그 땅을 딛고 서 있다. 아주 가깝고 멀게, 그렇지만 단단하게,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생명들은 모두 정치적이다. 살아 숨 쉬는 당신도 정치적 존재에 불과하다. 한강은 연결된 세계에 물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2]’


한강의 질문에는 작은 시소가 휘청이고 있다. 구역질이 나올 듯한 잔인함과 휘날리는 아름다움이 공존하며 방향 없이 흔들리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 한 가지다. 아름다움 대신 잔인함을 택하지 말라는 것. 폭력 대신 사랑을 택하라는 것.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울며 맞이하는 아침이다. 끝나지 않는 고통을 확인한 후 내뱉는 첫 번째 한숨이다. 광주와 제주에서, 서울에서,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벌어졌던 국가 폭력에 대한 슬픔은 우리에게 잔여물로 남을 것이다.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끝내 소년이 올 때까지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그것으로 살아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부조리에 저항하는 것, 눈을 부릅뜨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폭력 앞에 서 있는 당신을 향해, 소년은 영원히 달려가고 있다.



편집위원 서연 | waveandwavy@gmail.com




[1] 잔혹에 맞선 부드러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2024.10.11). 한겨레 21.

[2] Han Kang – Nobel Prize lecture in Korean (2024.12.7).THE NOBEL PRIZE.



참고문헌


기사 및 온라인 자료


이재호 (2024.10.11). 잔혹에 맞선 부드러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2024.10.11). 한겨레 21. Retrieved from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6204.html

한강 (2024.12.07). Han Kang – Nobel Prize lecture in Korean. THE NOBEL PRIZE. Retrieved from https://www.nobelprize.org/prizes/literature/2024/han/225027-nobel-lecture-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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