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상민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이는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주인공인 다니엘 블레이크의 유서 중 일부입니다. 그는 일평생을 성실한 목수로 살아왔지만, 지병이 악화되어 일을 이어나갈 수 없게 됩니다. 이에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가지만, 노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로 인해 결국 수급을 받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영화는 당시의 ‘촛불 시국’과 겹치며 큰 공감을 얻었고, 수입 ‘예술’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 성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촛불의 기억이 지난밤의 꿈처럼 느껴지는 지금, 이 영화를 다시 떠올릴 때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라는 그 ‘명대사’는 제 마음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물론 그가 개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는 ( )가 아니다’는 나를 ( )처럼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지 ( )가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 )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존재로 남게 됩니다. ‘나’가 그러한 화법을 유지한 채 부당한 상황에서 홀로 탈출하기만 한다면 말이죠.
‘페미니즘은 정신병이 아니다’, ‘나는 피해자지 창녀가 아니다’, ‘우리는 성실한 노동자이지 빨갱이가 아니다’, ‘내가 게이라고 에이즈 환자인 것은 아니다’, ‘내가 거지새끼도 아니고’, ‘장애인은 개돼지가 아니다’, ‘고양이는 벌레와 다르다’….
‘촛불 정부’ 아래에서도 당장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들의 처지는 그다지 나아지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이 ( )임을 부정하는 화법을 유지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어떤 존재가 ( )라는 사실이 낙인이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언제라도 ( )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이 문장 구조를 유지하면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정문이 아닌 긍정문으로, 이렇게 말해봅니다. ‘나, 상민. 정신병자입니다. 창녀입니다. 빨갱이입니다. 에이즈 환자입니다. 거지새끼입니다. 개돼지입니다. 벌레입니다.’
하지만 개인으로서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곳 고대문화에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고대문화라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고대문화를 읽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우리의 이름이 뜻하는 것은 ‘고대의 문화’가 아니라 ‘고대가 지향해야 할 문화’라고 애써 말해보아도[1] 우리의 기조를 유지하기 어려운 날이 머지않은 것만 같습니다. ‘촛불 정부’는 ‘촛불’을 배신한 지 오래고, ‘공정’이라는 텅 빈 기표만이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대항해 싸우는 일은 더 이상 시대정신도 아니고, ‘힙’하지도 않습니다. 위선보다는 위악이 차라리 낫다며 박수를 받습니다. 어쩌면 고대문화도 ( )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비겁해지지는 않겠습니다. 우리의 안위를 위해 ( )의 고통을 묵인하지 않겠습니다. 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 )임을 부정해야 하는 상황 자체를 부정하겠습니다. ( )에 넣겠다는 협박이 통하지 않는 날까지 펜을 내려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 )에 들어가겠습니다.
‘고대문화, 정신병자입니다. 창녀입니다. 빨갱이입니다. 에이즈 환자입니다. 거지새끼입니다. 개돼지입니다. 벌레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편집장 상민 / poursoi0911@gmail.com
* 교지대라는 한정된 자원으로 기존의 디자인·인쇄 품질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져 이번 호부터 광고를 싣게 되었습니다. 도움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독자 여러분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지난 호에 실린 「대학교지 네트워크를 만들며; 흔들리지 않을 우리의 목소리」를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