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처음 며칠 누나와 함께 등하교하며 길을 익힌 후 1km 남짓한 거리를 혼자 걸어 다녔다.
아침에 맑다가 오후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여지없이 온몸이 비에 젖어 집에 도착했다.
2학년 여름, 하굣길 쏟아지는 소나기 덕에 한참이나 참고 있던 오줌이 터져 나온 사건도 완전범죄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눈이 얼어 빙판이 된 오르막에서 미끄러지고 내리막에서 자빠져도 스스로 대견스럽거나 씩씩하다는 생각 없이 무덤덤하게 털고 일어났던 기억.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동생 혼자 있었다.
시장에서 장사하시던 부모님 두 분을 집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간은 저녁 10시 이후,
아버지 식사 준비를 위해 그리고 당신 끼니를 챙기시기 위해 낮에 그리고 오후에 잠깐 어머니께서 들어오시고,
늦은 점심식사와 새벽에 일찍 물건 하러 나가시느라 부족했던 잠을 조금이나마 채우시기 위해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동생을 심하게 대한 이유도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내가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의 잘못된 발로였을지 모른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지금도 웬만한 비는 머리에 꽃 꽂은 미친놈 마냥 좋아서 맞고 다니고, 빙판길이 두렵지 않으며, 혼자 요리해서 밥을 챙겨 먹는 게 어렵거나 귀찮지 않다.
나는 그리고 내 친구들의 어린 시절은 그랬다.
물론 개중에는 매일 엄마와 함께 꽃다운 모습으로 등하교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 상당수는 힘센 녀석들 눈치 살피며 '오늘도 무사히'를 바라는 교우관계부진아들이었다.
졸업을 앞둔 6학년 겨울, 롤러스케이트장을 드나드는 날라리가 되어 담배도 처음 빨아보고, 당시 고고장에서 유행하던 춤도 따라 췄다.
중학생이 돼서 날라리에서 양아치로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한 후, 길거리에 나뒹구는 비닐막걸리 병 속 본드 흡입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 체험하며 환각 속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본드보다 낫다는 부탄가스, 비닐봉지 콤비네이션을 몸소 체험하며 선명한 파란색 레이저를 날리기도 했다.
부모님이 하시던 가계 단골손님 아들을 건방지다는 이유로 쥐어 패서 시장 사람들 잔뜩 모인 가운데 아버지에게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싸대기를 맞으며 어른의 파워를 몸소 체험하고, 나 역시 아버지 같은 체력과 체격을 키워 약한 친구들 괴롭히는 악당들을 제압하는데 효율적인 일격필살기를 연마했다.
쉬는 시간, 가위바위보로 정해진 순서대로 책상 위 동전을 처서 뒤집히면 가져오는 돈치기를 필두로 도박에 눈을 뜬 후 누구보다 빠르게 족보를 익혀 고수들과 벌이는 섯다, 도리짓고땡, 7 포커에서 수익을 창출하고, 부모님 도장이나 사인을 받아오라는 반석차 끄트머리 성적표에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멋지게 사인하는 법을 터득, 다음 해에는 아버지 성함이 적힌 도장을 파서, 담임과 나만 아는 성적을 역사에 묻기도 했다..
중학교 2학년 수학 '도형의 닮음과 증명'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칠판에 그린 두 도형이 전혀 닮지 않았다는 의심을 품으며 수학에 관심 갖는 계기를 마련하고,
중학교 3학년 인문계, 실업계 기로에서 '넌 무조건 공고 가야 해'라고 윽박지르는, 지금 다시 떠올려도 더러운 인격의 담임선생을 향한 반항으로 인문계를 고집, 결국 아버지를 설득해 촌지 30만 원으로 해결하며 '공부라는 거 한 번 해보자'라고 결심한 이유가 바로 수학에 대한 관심이자 자신감이었다.
그로부터 고등학교 진학하기 전까지, 평소 심하게 괴롭혔던 전교 2등 녀석에게 지난날을 사죄하고 화해해 함께 수학을 공부하고, 영어는 기초가 아예 없는 탓에 혼자 성문기초영문법을 익히며 기본까지 마무리, 학원 수강을 통해 국어와 과학을 준비했다.
고등학교 진학 후 첫 모의고사 학급 석차 2등의 기적을 일으키고, 꾸준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모범생으로 지내다 같은 반 아이들을 괴롭히는 불량학생 3인조의 만행이 나에게 향하던 날, 조용히 공부만 하던 순한 양에서 각성, 한 놈은 주먹으로 패고, 강도를 높여 또 한 놈은 발로 차고, 나머지 한 놈은 화룡점정 주전자로 머리를 연타하는 업적을 쌓으며 학급의 평화를 구현했다.
술과 담배에 쩌들어도, 맘에 안 드는 놈들을 패고 다녀도 학생의 본분, 공부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불의의 사고로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학벌로 고개 숙이는 일 없이 살았다.
출처 : 구글 지도
한국에서 지내던 어느 날 저녁 8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주변으로 가는 길이 몹시 혼잡했다.
4차로, 일부는 5차로인 도곡로의 외곽 2차선 까지 정차된 차들, 때로는 3차로에서 주차할 곳을 찾느라 버벅대는 차들로 인한 병목으로 심한 정체.
그곳을 지날 때마다 늘 같은 상황이었다.
학원 수업 끝나고 귀가하는 자식 챙기겠다고 도로를 점거한 차량들, 부모들.
불안해서, 세상이 위험해서 그리 한다면 인구 1,000명당 CCTV 숫자가 중국과 미국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범죄율은 더 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면서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려는 그들에게 미국의 범죄율과 사망률이 더 높은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자녀들 걸어 다니는데 소모되는 체력이 걱정이라 말한다면 지난 10년 새 청소년 비만율이 2.4배 이상 증가한 사실을 아는지 묻고 싶다.
노인 일자리 창출에 죽어라 반대하던 보수 정당 국회의원을 선출한 강남병 지역구 주민들이 도대체 왜 그 혼잡한 도로를 나이 지긋하신 노인들이 정리하시게 하는지 따지고 싶다.
자기 자식 편하자고 남에게 피해 주는 그 짓거리를 매일 뻔뻔하게 자행하는 그 부모들 밑에서 자식들이 뭘 보고 배울지.
차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부터 꺼내는 아이들,
맛있는 음식 먹이고, 사달라는 거 사주고, 비싼 학원비 내주고, 좋은 방에 재우고, 좋은 차 태우고 좋은 대학 보내면 최고의 부모가 되는가?
비약으로 보일지언정, 남의 집 귀한 자식 학폭으로 인생 망친 가해 학생 부모도 제 자식은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며 갖은 방법 동원해 처벌과 불이익 피하게 하고 좋은 대학 진학시키려 하니, 그런 부모들이 여기는 부모의 의무는 그게 전부라 하겠다.
'내 새끼만 편하면 되고 내 새끼만 잘 되면 된다.'
그런 부모와 그런 자식들이 빚어내는 이기주의가 팽배하기에 오늘날 훈육이라는 말이 이토록 넘쳐흐르는 것 아닌가 싶다.
올바른 훈육,
자식과 다정히 손잡고 대중교통 이용해 걸으며 자연스럽게 대화의 시간을 갖으며 도모하기 바란다.
무학력 아버지, 초등학교 문턱만 겨우 밟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꾸중 들어 본 적 없다.
'남들 부러워할 만큼 열심히 살라' 말씀하신 아버지는 '무엇을 열심히 하라' 지칭하신 적 없었고, 고등학생시절 담배 냄새 가득 품고 술 취해 귀가했던 내게 어머니는 다음날 아침을 차려주시며 '내 새끼 하얀 와이셔츠 입고 회사 댕기는 모습 보고 싶다'는 말씀으로 훈계 대신 본인의 바람을 에둘러 표현하셨다.
아버지께 맞은 날, 평생 처음 아버지의 실망과 분노를 깊이 실감하며 다시는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려 하지 않았고, 바쁜 일상에도 자식의 얘기라면 만사 재치 시던 어머니께 좋은 소식만을 전하기 위해 잘못을 반성했다.
대가족이라 빈번했던 관혼상제에 주위사람들의 부담을 걱정하셨는지 남몰래 치르시기 일쑤였음에도 이웃의 일에는 언제나 발 벗고 나서시던 아버지.
평생 병치레로 고생하시면서도 자신의 일을 절대 남에게 미루지 않고 꿋꿋이 해내시던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