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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네디 Aug 16. 2023

독거중년과 참기름

저가 호텔을 찾는 외국 관광객들과 원정 유흥에 나선 한국, 일본인들로 붐비는 마닐라 말라떼 지역의 한 콘도.

나는 혼자 산다.


주말이면 새벽 3시까지 이어지는 밴드 무대, 술 취한 현지 젊은이들의 큰 소음으로 잠 못 드는 시끄러운 동네.

나는 조용히 산다.


구분이 있긴 하되 계절, 주야 내내 덥게 느껴지는 열대 우림, 열대 몬순, 사바나, 온난 습윤, 서안 해양성 등 5가지 기후를 가진 필리핀.

나는 시원하게 산다.


서로의 층간 소음이 당연하고 너그러운 건물 38층 작은 집에서 제자리 뛰기, 팔 굽혀 펴기, 근본 없는 스트레칭.

나는 건강하게 산다.


식상하기 그지없는 졸작들 사이에 숨어있는 아름다운 글들을 찾아 읽고 내 것과 비교하며 가치를 키우는 작업.

나는 글 쓰며 산다.


나는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한 집에서 간간이 운동하고 조용히 혼자 글 쓰며 산다.


하루 한 끼 한국 마트에서 산 재료로 직접 해 먹는 일이 귀찮지 않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다. 먹고살아야만 하기에 그냥 한다. 혼자 사니까.


그동안 매번 깜빡했던 참기름을 드디어 주문했다.

비빔밥 해먹을 작정이었다.


'부실한 재료, 다채롭지 않은 비빔밥이면 어떠랴? 나에겐 참기름이 있다.'


낮은 혼합률, 맥아리 없는 야채를 품은 밥 위에 김 빠진 콜라로 맛을 더한 양념장을 붓고, 건조하기 이를 없는 출신 불명의 깨까지 뿌려 넣은 후 일단 비볐다. 과거의 슬픈 비빔밥과 오늘의 행복 비빔밥을 비교하고 싶어서 였다.  

한 입 맛보니 역시 슬프고, 왠지 뻑뻑했다.  

이제 오늘의 행복 비빔밥을 영접할 차례.

화룡점정을 이룰 신묘한 액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냉장고 정상 한가운데, 동족임에도 신분을 달리하는 식용유 옆 근엄한 자태로 명상 중인 진짜 기름, 참기름.

내 그를 깨워 영롱한 빛을 맞이하고, 후각의 계몽을 일으키......


"퍽"


'쨍그랑' 이 아니었다. 가벼운 '팍' 보다 '퍽'에 가까웠던 중저의 파열음, 신분과 성품에 맞는 차분한 비명.

170cm 낙차에 산산조각 날만도 하건만, 차가운 에어컨 바람으로부터 그분을 감싸주었던 구릿빛 유리 성모를 마지막 순간까지 껴안으려 하셨으니, 그나마 온전한 유리 성모 상체 그리고 수 백 조각 비등방으로 깨져 나간 하체의 파편들.


슬펐다.


뻑뻑하게 비벼져 윤기 없는 과거의 슬픈 비빔밥을 오늘 다시 겪어야 하는 설움과 함께,

그분이 소명을 다 할 수 없게 된 이 참혹한 비극이 내 부주의에 의해 벌어졌다는 자책에 몹시 괴로웠다.


하지만 조속히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식욕이라 할지라도, 뻑뻑하게 비벼져 윤기 없는 과거, 오늘의 슬픈 비빔밥을 저대로 방치했다간 더 뻑뻑하고 더 윤기 없는 오늘의 괴로운 비빔밥을 먹어야 한다는 염려 탓이었다.


코를 막고 먹을지언정, 내 그분의 부드러운 품성이 못내 그리워 식용유 몇 방울을 넣어 비비자니, 같은 식용임에도 왜 이 식용은 그 분만 못한 식용이었어야만 했는지 답답한 맘 금할 길 없다.


가까스로 그릇을 비우고, 사방으로 피를 뿌리신 그분의 자취를 한동안 바라봤다.  

왜 스스로를 갈색으로 물들이셨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하얀색 바닥과 벽에 튄 자신을 구분하게 하시려는 배려.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차이를 더욱 실감케 하는 그분의 숭고함.

코로 숨을 크게 들이며 그 숭고함을 한껏 누리고 싶었다.


'참스런 향이여, 숭고한 희생이여!'


나는 혼자 산다.

이 공간에 조심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치우지 않았다.

아니, 불경스럽게 감히 치운다는 말을......

그분의 얼을 고스란히 남기고 깊이 새기고자 역사의 현장으로 삼고자 했다.


다양한 종류의 향수를 파는 매장에는 커피 원두가 있는데, 앞서의 향을 지우고 다른 향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원두 냄새를 맡는다지?


커피를 사러 나갔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기 전, 커피 가까이 코를 대고 후각에 남은 속세의 잔향을 모조리 지웠다.

그리고 문을 열어 그분의 가르침을 흠뻑 받아들였다.


두 분을 밟을 세라 조심스레 주방으로 갈 때마다 눈에 띄지 않던 유리 성모의 작은 살과 뼈가 내 발에 박히고,

어떤 경로로 날아오셨는지, 소파에 자리 잡으심에 얇은 팬티를 뚫고 내 연약한 엉덩이에 고통 주셨을지라도,

내 인생 또 다른 부주의 예방을 위해 내 몸에 경각심 깊게 심으시려는 성은 내 잘 알기에 참회하고, 다짐했다.


'인간이 되자.'


(49제를 지내고 보내드리려 했으나 브로커의 계략에 17층으로 이사해야 했기에 부득이 보름 간만 함께 했고, 새하얀 A4용지로 염한 후 엄숙한 장례 절차를 거쳐 평온한 곳으로 보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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