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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투 Jul 05. 2021

토끼와 거북이

작년 여름 우리 가족의 첫 캠핑이 시작됐다. 아들이 장성해서 독립한 친한 지인이 애들 크면 얼굴 보기도 힘들다며 둥이 어릴 때 많이 데리고 다니라고 캠핑 장비를 빌려주셨다. 뭐 밥그릇까지 다 빌려준다니 못 갈 것도 없겠다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짐을 쌌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한 번 경험 삼아 다녀오려던 캠핑에 아들이 푹 빠져서, 이제 여름휴가는 물론 틈만 나면 캠핑 타령이다. 나야 콘도나 호텔로 우아하게 다니고 싶지만 자식이 상전이라고, 아들이 행복하니 엄마는 이제 캠핑 고수가 되어간다ㅋㅋㅋ

막상 해보니 생각했던 것만큼 불편하거나 힘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연 속에서의 노동이 주는 노곤한 쾌감이 있다고나 할까? 애들만 쉬는 거지 어른은 계속 노동이다.


내가 찾아낸 보석 같은 캠핑장이 있는데 계곡 깊은 곳에 위치해서 외부인의 출입이 적고 관리가 잘 돼있어 더러운 걸 싫어하는 나를 유일하게 만족시킨 곳이다. 해발 700m 높이라 한여름에도 서늘해서 모기며 벌레도 적다.


첫 캠핑의 설렘을 안고 도착해 남편이 텐트를 치는 동안 아들을 조금이라도 더 놀게 해 주려고 먼저 계곡으로 내려갔다. 물이 발목 잠길 정도부터 시작해 완만하게 깊어지다가 한가운데는 어른 키 보다 깊어져서 3,4살 어린아이부터 성인까지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계곡이었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물도 맑고 폭포도 시원하게 쏟아져 계곡까지 완벽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발을 담그는 순간 정말 기절할 뻔했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해도 쨍하게 뜨지 않은 날이라 나는 발도 못 담글 정도였다.

‘아... 이번 여름 물놀이는 글렀네,  물놀이하러 이고 지고 왔건만 망했다 망했어’ 속에서 이런 생각들이 올라오며 처음 기대했던 마음과 달리 슬슬 짜증이 났다.

그래도 한 여름이라 그런지 남자들과 아이들은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다른 엄마들도 나처럼 물 근처에도 못 가고 사진만 몇 장 찍다가 다들 텐트로 돌아갔다.


둥이도 들어가겠다고 용기를 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처럼 입구에서 물 좀 적시고 시원하게 입수하는 게 아니라 한발 들어가고 한참 쉬고 한발 들어가고 한참 쉬고 하는 게 아닌가, 100살 할아버지도 이보다는 빠를듯했다.


“좀 더 쑥 들어가 봐 들어가면 안 추울 수도 있어”


“너무 차서 빨리 못 들어가요.. 이렇게 조금씩 들어가면 될 것 같아요”


입구부터 한 2m 전진하는데 30분 이상 걸렸다.

나무에 매달아 놓은 줄도 타며 첨벙첨벙 잘도 들어가는 아이들을 보니 느린 아들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화가 나서 급기야 소리까지 지르고 말았다.


“못 들어가겠으면 그냥 나오던가!!!”


“나는 내 스타일이 있어요!!!”


몇 번이나 그냥 나오라는 엄마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한 발짝 한 발짝 들어갔다. 정말 딱 한 발짝씩만 들어갔다.


“엄마!! 이제 됐어요”


거의 한 시간에 걸쳐 깊은 물까지 들어간 둥이는 그날 제대로 물 만났다. 천천히 헤엄쳐서 폭포까지 간 다음 폭포의 힘에 밀려 아래로 떠내려 오고, 또 헤엄쳐 가서 폭포에 떠내려 오고를 무한 반복하며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나중에 보니 워밍업 없이 들어갔던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오래 못 버티고 도망 가버렸다. 춥다고 입술을 파랗게 떨며 모두 돌아가고 계곡은 우리가 독차지했다.


슬슬 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계속 춥지 않냐, 추우면 바로 나와라, 이렇게 물이 찬데 안 추울 리가 없다며 안절부절못했다. 내 걱정과는 달리 둥이는 천천히 적응해서 그런지 그 차가운 물속에서 한참을 놀아도 하나도 춥지 않단다.


마치 끝없는 대양을 유영하는 한 마리 고래처럼 유유히 폭포를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여유 있고 자유로워 보였다.

다른 사람 신경 쓰지 않고 엄마의 조바심도 견뎌낸 아이의 인내심에 감탄했다.


거의 해가 져서야 물 밖으로 나와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고기로 배 채우고 모닥불에 마시멜로우도 구워 먹으며 한없이 행복해했다. 내년에도 여기 오자며 벌써 다음을 기약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머릿속에 영사기를 틀어 논 듯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세상에 문제 아이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더니, 이게 무슨 꼴이람.

빨리 들어가라고 재촉하더니 또 빨리 나오라고 난리 치고, 다시 생각해도 참 한심했다.

아이는 자기 나름의 속도로 서두르지 않고 목표를 이뤘고 기쁨을 누리고 자유를 만끽했다.

성격 급한 엄마만 그 시간을 누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걱정하는 것보다 항상 훨씬 더 잘 해낸다. 믿지 못하는 부모가 문제다.


일상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겠구나.. 거북이 같이 느린 아들이 토끼 같은 엄마와 사느라 힘들었겠구나...

안쓰러워 꼭~ 안아준다.


아들은 벌써부터 그 여름 계곡을 추억하며 휴가를 기다리고 있다. 올해는 친구도 데려가 달라며 조른다.

이번엔 재촉하지 않고 우아한 엄마처럼 끝까지 기다려 주리라!!

앞으로 둥이 인생에서 만날 많은 선택의 순간에도 그럴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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