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듯한 미국 생활

덜 안전한 여행이었지만.

by 파란선


뿌듯한 미국 생활


“속보입니다. 내일 새벽에 리치몬드에도 토네이도가 온다고 합니다. 외출에 각별히 신경 쓰시고 될 수 있으면 집에 계십시오.”


매일 CNN 뉴스를 시청하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토플시험을 세 달에 한 번씩 시험을 보았는데, 매번 듣기 영역 점수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뉴스 덕에 난생처음 들어보는 ‘토네이도’ 소식을 접하였다. 토네이도(회오리바람)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의 집을 옮겨주던 회색빛 마술 바람 아니던가. 거센 회오리바람의 토네이도는 영화나 동화책에서만 나오는 실존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저 지나가는 강한 태풍이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전부터 심상치 않았던 비바람은 급기야 거세한 바람으로 변했고, 대학교 근처 아파트 고층에 살았던 나는 등교도 하지 못한 채 아파트 안에서 3일 동안 갇혀 지내야 했었다. 지나가는 태풍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무서운 경험이었다. 높은 층에 살았던 나와 룸메이트는 두 손을 붙잡고 방 안에서 떨어야만 했다. 발코니에 있던 큰 창문이 다 깨질 것 같았던 악몽 같은 밤이었다. 그날부터 전기와 물이 일주일간 끊기고, 지하 주차장과 거리는 물이 넘치고 나무와 신호등이 넘어져 차를 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 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우리는 토네이도가 지나간 후 꺼진 냉장고 안에 두었던 아끼던 한국 음식재료들부터 가스버너를 이용하여 음식을 해 먹었고, 미리 받아 둔 생수와 음료를 아껴 마시며 버텼다. 난리가 난 발코니 청소와 지하 주차장 정리가 늦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상상도 못 해본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유럽 여행 후 여행이 그리워서 돈을 모아 주말여행을 가기도 했고, 전공을 바꾸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새로운 공부도 열심히 하였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급기야 힘들게 진학한 대학원을 휴학하고 미국에서 공부를 해보겠다며 무작장 떠났던 것이다. 미국에 가는 일은 유럽여행처럼 새로운 세상을 보고 오리라는 긴 여행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생활은 공부를 포함한 모든 것을 가이드 없이 혼자 해내야만 하는 ‘덜 안전한’ 여행이었다. 그 누구도 부모처럼 해 주겠다는 사람은 내 곁에 없었다. 또한 사소한 것들을 언제든지 물어볼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공부하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처음이나 마찬가지라 어려웠다. 작게는 장을 봐서 끼니를 해결하거나 빨래를 하는 일도 고되고 힘들었다. 라면을 끓이거나 계란 프라이 등 간단한 요리를 하고 난 후 더러워진 주방 청소나 설거지 감도 귀찮았다. 정기적으로 해야 하는 화장실 청소 등 집안일은 생소하고 어려웠다. 늘 당연하게만 여겼던 부모의 보살핌과 지원이 그립기도 했다. 짧은 미국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부모님께 자식이라 받았던 대가 없는 지원에 감사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했던 미국행이었기에 불평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토네이도를 만난 후 나는 평소에 힘들었던 빨래나 음식하기 등의 집안일이 즐거워졌고, 내 삶은 더 풍요로워졌다. 용돈을 벌기 위해 미국인 가정에서 미술과외와 베이비시터 등 시간제 일을 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거주하는 짧은 기간 동안 작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휴대전화비 미납으로 전화가 끊긴 일,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데 갑자기 차가 멈춰서 정비소에 맡겨야 했던 일. 내가 스스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모두가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그때마다 스스로 길을 찾아 해결해야 했다. 그렇지만 불편한 상황들은 언제 가는 해결 되었고, 종종 뿌듯함을 느꼈다. 놀랍게도 힘든 사건이나 사고가 생길 때마다 (물론 해결하기에 바빴지만) 그 후에는 말할 수 없는 묘한 성취감에 휩싸였다. 내가 해냈다는 성취감 혹은 뿌듯함 말이다. 대단한 일로 인해 상을 받거나 축하를 받은 일도 아닌데 그 어떤 칭찬보다 기분이 좋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영어로 말하기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영어에 자신감이 생긴 후로는 학교에서 만난 미국인이나 유학 온 유럽인 친구들과 쉽게 어울리게 되었고, 대학 과정 전에 외국인들이 수강해야 할 파운데이션 수업을 쉽게 패스할 수 있게 되었다.


방학 때에는 한국에 들어가지 않고, 미국 동부 곳곳을 여행하며 경험을 쌓았다. 친구들이나 단체에 의지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곳으로 먼저 찾아갔다. 그중 좋아하는 것 중 하나는 조용한 곳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가깝게는 근교로 캠핑을 가고, 멀리는 나이아가라 폭포까지 운전하는 등 마음껏 여행을 즐기며 혼자 시간을 보내고는 하였다. 한국에서 성인이 된 후로는 동아리에서 민박하는 1박 2일 여행을 간 적은 있지만 캠핑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분명 어릴 때 아람단, 스카우트, 극기훈련 활동으로 단체 야외활동을 한 것은 같으나 친구나 가족과 함께한 캠핑은 희미하다. 나는 야외활동을 꽤나 좋아했지만, 자주 경험해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주말에는 캠핑 외에도 미술관 관람으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내가 거주한 지역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이 모여 있는 워싱턴 D.C는 멀지 않아 자주 다녔던 것 같다. 이러한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한 경험들은 내게 많은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나는 왜 그동안 자기 주도적인 경험들을 하지 못하였을까. 아무래도 이미 소문난 안전한 길들로 가라고 했던 사랑의 잔소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랫동안 근무한 IB 스쿨 초등 교육 과정 중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에이전시(Agency)’ 를 많이 강조한다. 이는 학생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반영하고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 위하여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는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남에 의해 행동(being acted) 하기보다 스스로 행동(acting) 하는 것이며, 남에 의해 변하는(being shaped)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shaping)되며, 다른 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 나의 책임감 있는 선택과 결정을 하게끔 교육하는 것이다.


2016년 연구에 따르면 ‘학습에 선택 의지가 있는 학생이 더 동기 부여되고 학습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으며 결과적으로 학업 성공을 달성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입증되었다(Lin-Siegler, Dweck, and Cohen 2016, 297).


미국에서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경험들은 의미 있고, 의도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나의 권리와 책임을 인정하며, 선택 의지를 발전시켜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영어에 곧 자신감이 붙은 나는 당시 거주하던 버지니아 주에서 멀지 않은 뉴욕시에 있는 대학원에 가기를 희망하였다.



*에이전시(Agency)라는 단어에는 단체나 기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교육에서 많이 쓰이는 ‘특정한 효과를 일으키는 행동이나 개입’의 뜻이 있다. 또한 IB 교육에서는 에이전시(Agency)를 바탕으로 일구어낸 능력은 스스로에게 권한을(Empowering) 부여하고 소유권(ownership)을 갖게 하여 강한 리더로 만든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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