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해외 여행이었지만,
안전한 유럽 여행
“ 유럽여행 갈 사람 있어? 가이드를 데려가는 자유여행 패키지래. 우리 졸업하면 언제 시간이 생길지 모르잖아. ”
유럽여행과 어학연수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다. 저렴한 유럽 여행 패키지며 배낭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여행사마다 앞다투어 내놓고는 했다. 학교에는 이미 유럽 여행 다녀온 친구들도 꽤 있었고, 어학연수를 다녀와 복학한 선배들도 있었다. 너도 나도 저렴한 배낭여행을 가기 위해 여행사 특가를 찾아보던 때이기도 하였다.
2000년 밀레니엄, 그렇게 내게도 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찾아왔다. 한 나라에서 길면 3일 짧으면 반나절 정도로 많은 나라를 다녀오는 겉핥기식 배낭여행이었다. 과 친구 부모님의 지인이 한다는 여행사에서 새롭게 내놓은 자유여행 패키지 인데, 정해진 가이드가 대학생 한 그룹을 데리고 3주간 다녀온다는 ‘안전한’ 해외 여행 상품이었다. 부모님을 동반하지 않고도 갈 수 있다는 장점을 앞세운 패키지라 여대생들의 부모님들에게 솔깃한 상품이었다. ‘어린' 대학생을 둔 부모를 타겟으로 삼은 것이다. 우리끼리 여행하는 자유여행이지만 가이드가 미술관 표도 끊어주고, 기차나 호텔도 예약해주어 고생이 덜 되는 그런 여행인 것이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길도 헤메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모험을 해야 되는 것인데, 지금껏 그랬듯 부모님이 기꺼이 찾아준 ‘안전한' 방법으로 첫 해외여행도 시작하였다. 어찌되었건 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을 혼자든 둘이든 친구끼리 가는 것은 무서웠던 나는 그 ‘안전하고 편한 유럽여행' 을 부모님 허락하에 합류 하였다.
유럽 여행을 가기전에 우리가 준비할 일은 여권 발급, 환전과 개인 짐 챙기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세상에 하나뿐인 엄마표 여권 지갑도 잊지 않았다. 안전하게 짜여진 유럽여행이였기에 어디를 먼저 갈 것인지 어떤 호텔에서 잘 것인지 어떻게 이동할 것인지에 대한 설레임은 없었지만, 인천 공항에서부터 시작한 우리의 첫 유럽 여행은 흥분으로 감출 수 없을 정도였다. 장시간 비행기를 우리끼리 타는 것, 파란눈과 금발의 서양인들을 더 많이 만나는 것, 입국할때마다 여권에 도장을 찍는 것 등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모든 것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여행의 시작점이었던 이탈리아 로마도, 여행의 종착지였던 스위스의 루체른 도시도 말도 못하게 아름다웠다. 서양미술 책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듯한 멋진 건축물들이나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 화풍들의 작품들, 하물며 입시 내내 그렸던 하얀 석고상들이 미술관에 줄줄이 전시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곳들을 단 사흘 만에 보고 지나치다니, 아쉬움이 너무나도 컸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와서 오랫동안 여행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하는 유럽 여행이었기도 했다.
갓 스무살 넘은 나는 같은 과 친구들과 함께한 여행, 그것도 유럽 여행이었기에 더욱 행복하였다. 그 시절에는 스마트폰이 없었기에, 매일밤 우리는 각자 가져온 다이어리에 기차표나 스티커등 기념이 될만한 것을 붙이고 메모를 남기는 저녁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미숫가루를 한 여름에 우유와 먹다가 단체로 탈이 난 일, 한식을 먹고 싶어서 김치찌개 한그릇을 이만 원 정도에 먹고도 좋았던 날, 호텔 조식 후 집합했는데 여섯 명 모두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이스트 백팩을 메고 나타나 자지러지게 웃었던 기억까지 그야말로 즐거운 추억이었다. 어쩜 그렇게 같은 긴 생머리에, 같은 스타일 옷을 입고 있었을까. 우리는 그렇게나 남들이 좋다고 하거나 멋지다는 유행을 쫒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내 인생에 큰 변화를 준 몇번의 경험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인 대학때의 유럽 여행은 내 평생 처음으로 부모님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안전한' 유럽 여행을 다녀오게 도와준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행을 하면서 새롭게 보고 느낀것 외에도 나에게 많은 생각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작고 반듯하고 야무지게 그려진 네모 같은 나에서 엉뚱하게 그려진 동그라미나 랜덤 모양으로 변화하고 싶어졌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욕구가 생기기도 하였다. 외국어에 관심이 없더 나는 가이드에게 늘 의존하였던 유럽 여행 후 영어로 말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새벽반 영어 회화를 등록하였다. 또한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데 소극적이었던 나의 성격과 다르게 조금 더 과감한 계획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번지점프를 시도한다거나, 가까운 곳으로의 여행을 스스로 계획해서 가는 것들 말이다. 비록 안전하게 계획된 유럽여행이었지만, 나는 분명 동기부여가 되어 변화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고 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