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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처럼 Mar 09. 2022

유모

쌀밥

유모 등이 참 따뜻하다. 유모는 내가 찬바람을 맞지 않게 두루마기로 머리부터 씌우고는 내 엉덩이 밑으로 두 손을 꽉 잡고 있다. 내 양손은 깨끗한 수건에 싸인 따뜻한 쌀밥 한 공기를 조심스럽게 쥐고 있다. 내가 유모 등에 업히는 걸 본 엄마가 솥에서 막 지은 밥을 담아 준거다.

따뜻한 쌀밥은 유모네 집에 가서 언니 오빠들이 먹을 시래기죽과 바꿔 먹을 거다. 엄마는 내가 유모 등에 업히면, 유모네 집에서 뒤퉁 거리가 되지 말라고 항상 밥 한 그릇을 챙겨준다. 유모가 유모네 집으로 돌아갈 때는 저녁밥 준비를 마친 때라 따뜻한 밥을 가지고 갈 수 있다. 사실 집에서 엄마와 밥을 먹어야 하지만 만삭인 엄마는 나를 챙겨줄 힘이 없어서, 내가 유모를 따라가는 게 엄마를 도와주는 거다. 

유모는 언니들이 있는 방에 나를 내려놓고는 “우리 막내딸, 언니들이랑 재밌게 놀아요. 죽 끓여올게요”라고 웃으며 내 엉덩이를 토닥토닥하고는 저녁을 지으러 부엌으로 들어간다. 나는 유모가 방문을 닫으면, 뜨끈 뜨근한 아랫목 이불 밑으로 밥공기를 넣는다. 식지 말라고 이불로 잘 덮어둔다. 수건으로 싸여 있어서 처음처럼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하다. 내가 유모가 끓여준 죽을 먹고 좀 놀다 보면 머슴이 데리러 올 거다. 머슴 등은 땀 냄새가 나지만 숨을 조금만 참으면 되니 괜찮다. 머슴이 못 올 때는 내가 유모네 집에서 자는 날이다. 우리 집과 유모네 집은 그리 멀지 않다. 나도 혼자서 갈 수 있는데, 동네에 망태를 메고 다니는 봉기가 어두워져서 혼자 다니는 아이들이 있으면 잡아간다고 해서 혼자는 못 간다. 나는 유모랑 언니들 사이에서 자는 게 좋아서 머슴이 안 왔으면 할 때가 많다. 

언니들 방에는 작은 돌멩이가 참 많다. 내가 언니들이랑 돌멩이로 숫자를 세다가 100까지 셀 수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무척 좋아하셨다. 엄마 보고 유모네 집에 자주 놀러 보내라고, 소고기도 다섯 근이나 보냈다. 엄마는 내가 유모네 집에서 시래기 죽을 먹는 걸 모른다. 쌀밥보다 더 맛있는 시래기 죽인데, 내가 밥이 아닌 시래기 죽을 먹는 걸 알면 유모네 집에 못 가게 할까 봐 말을 안 한다. 내가 키는 작아도 눈치는 빠르다. 

나는 손이 작아 공기놀이를 잘 못하는데, 언니들은 돌멩이 다섯 개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천정으로 던져 다시 손바닥에 받기를 참 잘한다. 언니 둘이서 가운데에 돌멩이를 잔뜩 쌓아놓고 다섯 고개를 넘기고 넘기고 하다 보면 가운데 돌멩이들은 언니들 앞으로 자리를 옮기고 가운데는 바닥이 보인다. 나는 언니들이 노는 걸 구경하다가 돌멩이로 그림을 그린다. 나무를 그리고 해, 꽃, 바람을 돌멩이로 그리다 보면 내 돌멩이가 바닥이 나서 흘깃흘깃 언니들 돌멩이를 하나씩 가져온다. 나보다 많이 큰 언니들은 나를 보고 웃는다.

유모는 내 엄마보다는 늙고 할머니보다는 젊다. 유모는 옛날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어서 저녁밥을 먹고 나면 언니들과 나를 아랫목으로 불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춘향이와 심청이, 콩쥐팥쥐는 하도 들어서 나도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 어떤 날은 힘들다고 누워 있는 엄마 배에 손을 대고 아직 얼굴도 모르는 동생에게 콩쥐팥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는 그때를 두고두고 아버지한테 자랑을 했다. 아버지는 그날도 유모를 칭찬했다. 

신작로 가는 길 담벼락에 노란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을 때 엄마는 소리소리를 지르고 동생을 낳았다. 쭈글쭈글 시뻘건 못생긴 동생은 유모가 따뜻한 물에 씻기고 예뻐졌다. 나는 할머니 방에 가 있으라고 해서 동생을 못 봤는데, 유모가 알려줬다. 이제 유모는 동생을 챙긴다. 내가 마당에다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그려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동생이 참 밉다. 내가 유모를 차지할 때는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는 유모 등에 업힐 때다. 엄마 대신 금자 언니가 챙겨주는 따뜻한 쌀밥 한 공기를 양손에 쥐고 유모 등에 업히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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