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 눈이 내리면 설악산을 다녀와야지 했는데 갑자기 내린 57cm 폭설에 움직이질 못 했다.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벌써 꽃피는 봄이다.
지난해 토왕성폭포 전망대에 오르며 두 달에 한 번씩은 산을 찾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분명 오면 걸음도 가볍고 산길을 걷다 보면 기분도 좋아지는데 말이다.
설악산 입구, 겹벚꽃이 피었다.
4월 비가 내린 어느 다음 날, 일찍 집을 나와 속초의료원에서 7-1번 버스를 타고 설악산 종점에 내렸다.
설악산은 내설악과 외설악으로 나뉘는데 속초는 외설악으로 케이블카로 가는 권금성, 신흥사, 비룡폭포, 토왕성, 비선대, 울산바위 등이 있다.
이석증으로 한 달 넘게 고생한 나는 출발부터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오르다 힘들면 다음에 또 가면 된다'는 생각에 속마음이 편해졌다. 석가탄신일이 한 달도 남지 않아 입구부터 곳곳에 연등이 달린 모습을 보니 '세상은 그래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추운 겨울이 지나니 따뜻한 봄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흥사로 가까이 갈수록 반가운 소나무가 보인다.
내 친구인 '마음의 나무'다.
만난 지 3년 됐다.
무심코 길을 걷다 만났다.
설악산 갈 때마다 꼭 찾아가 먼저 인사를 한다.
'잘 있었어? 보고 싶었어. 미안하다. 자주 찾지 못해서'
마음의 나무는 좀 더 앙상해졌다.
겨울에 많이 추웠던 걸까. 점점 가지가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니 나이가 들어 빠지는 내 머리숱 같아 보여 안쓰러웠다. 아무리 탈모 샴푸를 쓴다고 해도 머리숱이 점점 빠지는 걸 막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내 친구 '마음의 나무' 혼자라 외롭지 않을까
친구에게 '울산바위 다녀올게' 인사를 뒤로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곡 옆 흐르는 물소리도 좋고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왁자지껄한 소리도 좋다.
마치 숲 속 교향곡이 열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물과 바람이 만나니 오케스트라가 따로 없다.
혼자 걷다 보면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집중을 하게 된다.
흐리지만 해가 없는 오늘은 걷기 좋은 날이다.
흔들바위 0.6Km의 이정표를 따라 오르면 '소원 탑'을 지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이 시작된다.
이곳을 이겨내면 흔들바위는 금방이다.
내가 걷는 길은 누구든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그만큼 나는 오르막길에 익숙지 못하다.
그래서 아직도 '산'에 갈 때는 좀 더 단단한 마음가짐을 하고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작년부터 강원도를, 특히 속초에 살며 시작한 '걷기'는 산에 오를 때도 자신감이 생겨났다. 카페 일을 하며 무릎과 발목이 아파 걷지도 못해 병원 치료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나면 걷는 습관이 생겼다.
아파도 좀 걷다 보면 어느 날은 몸과 마음이 가볍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흔들바위 올라가는 입구에 소원의 돌들이 가득이다
울산바위에 오르기 전 만난 흔들바위는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하지만, 아껴두고 정상을 찍고 내려와 쉬고 싶었다. 지금 앉으면 울산바위까지는 갈 수가 없을 거 같아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바위 옆에는 석굴 '계조암'이 있다. 벚꽃과 함께 연등꽃이 알록달록 펴 산속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 모든 공간이 아름다웠다.
'지금부터 나와 함께 걸어볼까.'
고즈넉한 산속에 계조암이 있다
이제 정상을 향한 마지막 산행의 시작이다. 중간에 평지와 오름이 반복되고 숨 고르기를 하며 20대에 맞 본 그 공포의 계단을 드디어 마주하게 된다. 그때는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왔는데 이제는 혼자, 그것도 멈추지 않고 걸어왔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계단을 지나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정상이 보인다.
하지만 오르니, 정상이 아니었다.
울산바위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에서
다시 계단을 보며 천천히 따라 오르니 이 길의 끝, 정상에 올랐다.
그때의 기억에는 뭔가 평평한 넓은 곳이 펼쳐졌다 생각했는데 막상 올라가니 정상은 크지 않았다.
세 곳의 스폿이 있고 앉기 좋은 곳엔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등지고 앉아 있어 나는 모퉁이 계단에 앉았다. 어디 앉아도 울산바위가 보이고 속초 도시가 보인다.
역시, 올라오면 숨을 크게 쉴 수 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마지막은 눈을 감는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감고 이곳을 느끼며 내가 살아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 후회는 없었는지, 지금 잘하고 있는 건지, 높은 곳에 오면 그 짧은 순간에 왜 자아성찰을 하게 될까. 아마도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 찰나의 순간이 정말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마지막 계단에 오르며 너를 만난다
아쉽게도 고소공포증으로 더 가까이 가질 못 했다. 네가 바로 앞에 있는데 말이다.
올라오니 바람이 다시 세게 불어온다
설악산 입구에서 울산바위 정상까지는 3Km 남짓 걷지만 얼마나 많은 마음속의 조각들이 요동쳤는지 모른다. 오를 때마다 '내가 왜 가야 하는지'하는 그 물음도 이제는 잊게 하기에 나는 산을 멈추지 않고 오르고 있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걷다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에 그 편안함에 육체는 힘들지라도 속 마음은 비워진다. 오늘도 내 속주머니를 이곳에 놓고 내려올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맑아진다.
산에 올라야 멋진 풍광을 비로소 볼 수 있다. 오늘도 나는 숨을 쉰다.
잠시, 앉아 정상의 기분을 만끽하고 사진도 찍고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 소요시간은 두, 세 시간 걸린다는데 나는 5시간이 걸렸다. 아직 이석증이 있어 내려올 때 3시간 이상을 걸었다. 다시 머리는 빙그르 돌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내려가는 길은 오름보다 더 신중히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가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은 덤이었다.
빨리 다시 친구가 만나고 싶어졌다.
친구한테 자랑하고 싶었다.
마음의 나무를 찾아, 잘 다녀왔다며 인사를 하고 차근차근 말을 건넸다.
'넌 요즘 기분이 어때?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공기 좋은 곳에서 아프지 말고 잘 지내렴.'
이제는 봄이다.
이 봄이 지나면, 여름, 가을, 그리고 또 겨울이 오겠지.
우리도 늘 그렇듯 그 자리에서 버텨보자.
산에서 내려오니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였듯 버티다 보면 분명 우리에게도 좋은 날이 찾아올 거야.
내려오는 길에 하늘이 맑다
설악산 등반의 꽃은 '대청봉'이라는데 나는 언제 오를 수 있을까? 혼자 토왕성폭포, 비선대, 금강굴 그리고 울산바위까지 오르며 산과 친해지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올 가을 아니면 내년엔 대청봉에 대한 글을 꼭 쓰고 싶다. 누군가가 나를 응원하며 등반 팁을 건넸다. 왜 하루에 다녀 올 생각을 하냐며 1박 2일 천천히 걷고 하루 잠도 자면서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만나라고 했다. 그 말이 너무 낭만적이었다. 별 보는 거 좋아하는데, 어떻게 알았지. 가슴은 벌써부터 두근두근 설레는데 용기와 체력이 아직 부족하다. 조금씩 채워가며 목표를 향해 욕심부리지 말고 도전해야겠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빨리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