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 호수, 벚꽃길이 피었습니다

[속초 사잇길_1길 코스 영랑호길]

by 지금도바다

작년 속초에 3월 말부터 핀 벚꽃은 올해 기상 이온으로 4월 초가 지나셔야 꽃망울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꽃피면 온다는 아는 언니와의 매일 전화로 벚꽃 개화시기를 얘기한다.

우리끼리 아무리 얘기한들 꽃들의 마음을 알 수가 없는데 오늘도 언니의 전화를 받는다.



20220401_100141.jpg 영랑호에서 4월, 눈 내린 설악산의 울산바위



일주일간 매일 아침, 영랑호를 걸으며 벚꽃을 관찰했다.

오늘은 얼마나 나왔을까.

작은 동그라미가 올라오고 그 머리를 뚫고 나온 붉은빛의 꽃망울이 보인다.

저 꽃망울은 언제 또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두 눈을 더 크게 뜨고 매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해도 좀처럼 피질 않는다.

아는 언니가 일주일 늦게 오기로 했는데 기왕 늦은 거 천천히 피면 좋으련만 왜 이리 갑자기 붉은 기운의 나무들로 물들어 가는지, 너도 나도 경주를 시작한 걸까. 초여름 기온으로 나의 바람과는 달리 수요일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주말에 만개하는 게 아닐까.

벚꽃이 하루, 이틀 지나며 역시 금요일에 활짝 폈다. 하지만 주말에 내린 강풍주의보는 벚꽃을 다시 빠르게 떨어뜨렸다. 월요일 아침, 부지런히 호수에 갔는데 벚꽃길은 눈처럼 바닥에 꽃잎이 쌓였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꽃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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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호 8Km의 벚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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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보아도 좋다. 꽃들도 알까



자연은 사람이 생각하는 순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 때가 있다.'라고 하지 않는가.

늦게 피면 그만큼 오래 머물지 알았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4일 만에 우수수 떨어졌다. 바람이 조금만 불면 좋았을 텐데. 강풍이 3일 내내 몰아치더니 그렇게 한 달 동안 기다린 벚꽃은 초록잎이 그곳을 매우기 시작했다. 늦게 핀 벚꽃에 누가 채근하지도 않는데 바쁘게 또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좀 아쉽긴 하다.

작년에는 2주 정도 속초 곳곳에 핀 벚꽃길을 걸으며 우울했던 기분이 좋아졌는데 그 기분을 바꾸기도 전에 벚꽃들이 바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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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녁, 호수가 오늘따라 마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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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길의 시작을 알리는 입구 길



일주일 후, 아는 언니가 일산에서 속초로 왔다. 강풍으로 벚꽃은 다 져 쓸쓸해 보였지만 그래도 '너와 함께 걸으면 좋다'는 언니 말에 오후 영랑호를 찾았다. 걷는 동안 그 남은 꽃잎들은 다시 바람에 흔들려 꽃비를 뿌리며 우리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었다. 2시간 남짓 걸음도 멈추지 않으며 무슨 얘기를 그렇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영랑호는 혼자 걸을 때도 좋지만 누군가와 함께 걸어도 좋다.

걷다 보면 흙냄새 꽃냄새도 좋고 왜가리가 날고 부딪히며 내는 소리도 이제는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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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비가 말없이 내렸다.



빽빽한 빌딩 숲에 가려 살았던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서울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속초에서는 턱 없이 부족함을 느꼈지만 이제는 나도 어느덧 이곳이 익숙하다. 순응하지 않으면 불만만 쌓이기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점을 찾다 보니 집에서 5분 거리에 영랑 호수가 있고 바다도 있고 좋은 물이 있고 보이지 않은 맑은 공기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처음보다 많이 편해졌다. 물론, 항상 편하지는 않다. 그래도 조금의 여유를 갖고 주위를 돌아보니 언제부턴가 넉넉한 익숙한 냄새가 들어왔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자꾸 편협해지고 잘 보질 못 하듯 그 안에서 나오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좁은 길에서 빠져나와 확 트인 큰길을 걷다 보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20220411_082324.jpg 영랑호는 석호로 여러 빛깔을 만날 수 있다



봄의 파릇함에 새 옷을 입었고

여름의 울창함에 그늘을 내어주었고

가을의 알록달록함에 사색을 느끼게 해 주었고

겨울의 앙상함에 다시 옷을 꺼내 입었고

다시 봄을 기다리게 되는 사계절 바뀌는 영랑 호수를 보며 내가 사는 삶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혹,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해도 나를 말없이 잡아주는 이 길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걷다 보니 얘기해주고 싶었다. 언니도 나와 함께 느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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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호수를 덮고 빛을 뿜어 낼 때




작년 봄 아침, 언니는 '오랜만에 차려 준 밥상을 받아 본다'며 좋아했다. 항상 집에서 가족의 삼시 세 끼를 차리는 언니는 작은 일탈에도 '쉼'을 할 수 있다며 행복해했다. 그때 생각에 이번엔 잡채, 미역국, 동그랑땡까지 부지런히 준비했다. 따뜻한 밥 한 끼 차려주고 싶었다. 동명항에서 생선회 3만 원을 사고 담근 오미자주를 마시며 긴 대화를 했다. 1년에 한 번씩 밤새도록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기쁘다며 활짝 웃는 언니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만나고 싶을 때 항상 보면 아쉬움은 없겠지만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니 아직도 한참이 남았다. 내년 이맘때쯤 언니가 오면 뭘 해줄까.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잡아볼까. 아니면, 밤바다를 보며 치맥 한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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