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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도바다 Sep 18. 2021

흐린 날, 송지호(산소) 둘레길을 걷다 만난 왕곡마을

[고성제 7경 송지호]

송지호 오토캠핑장 - 산책로 - 둘레길(남) - 왕곡마을 - 둘레길(북) - 철새 관망타워 


▶ 제1경 관동별곡 9백리 길 

▶ 강원도 고성 해파랑길 

▶ 동해안 국토종주 자전거길

▶ 고성갈래 제7구경길 




집앞 바닷가 새벽, 해가 이쁘게 떠올라 바쁘게 나갔다.





여름 끝자락이 끝날 때쯤, 어디든 떠날 생각에 지루한 집콕은 이제 끝나나 했는데, 늦게 시작된 장마는 멈추지 않고 계속 비를 뿌렸다. 하지만 답답함에 걷고 싶어 비가 멈춘 늦은 오후, 밖으로 나왔다. 


지난번 화진포를 다녀오다, 버스에서 스치는 송지호 관망타워를 보고 '다음에는 전망대를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검색해보니, '송지호 둘레길'의 시작점으로 함께 코스로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부담 없이 35분 정도 버스로 달려 내린 정류장은 '송지호 오토캠핑장'으로 초능력이 없는 이상 건너편에 자리한 타워로 바로 가기는 어려웠다. 네이버 '길 찾기'는 왜 그랬을까. 가끔 길을 검색하다 보면 길이 뚝 끊기는 곳으로 나를 인도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깜깜한 밤 제주도 애월에서 갑자기 걷다 멈춘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길 찾기 서비스는 개선이 어려운 것일까. 어두운 밤이었다면 막막했겠지만 아직은 오후라, 괜찮다. 방법이 있겠지.





송지호 오토캠핑장
송지호 해변, '소'는 뭘까, 태풍에 다른 글자는 날아갔나, 빈 틈이 없어 더 궁금해진다.





캠핑장 아래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 길을 물으니, "전 정류장에 내리셔야 했는데, 바다로 나가시면 나무테크 길이 있으니 끝날 때쯤 다리 아래로 내려가 건너편으로 가야 둘레길을 가실 수 있어요. 다리 위로 올라가지 말고 꼭 아래로 가셔야 돼요." 다른 어떤 말보다 '아래'를 기억하며 생각지도 않은 송지호 해수욕장으로 나가 옆 테크 길을 걸었다. 비가 내린 길은 바다내음과 풀내음이 적당히 올라와 있다. 15분 정도 걸었을까. 나무테크가 끝나갈 때쯤 건너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 아랫길이 나와 길을 건너 둘레길 초입에 도착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길로도 가고 시간도 지체될 때가 있지만 이 길은 왼쪽은 바다가 오른쪽은 나름 초원이 있어 여행 온 기분이 물씬 든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시간이 있다면 캠핑장에 내려 건너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송지호해변과 둘레길을 이어주는 다리
오토캠핑장앞에 산책로가 있다
저 멀리 설악산이 보인다. 




'산소길'이라는 표지판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둘레길'은 양방향으로 진입이 가능하다. 얼마나 산소를 뿜어내는 길이기에 이름이 붙여졌을까. 갑자기 큰 숨을 쉬게 되고 움츠렸던 내 마음도 서서히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걸어볼까. 늦게 시작한 만큼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송지호 산소 둘레길 시작이다
걷기 편안한 길, 송지호 




송지호 둘레길은 자전거도 탈 수 있는 편한 길이다. 비포장도로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시멘트 길로 흙길을 걷고 싶은 나에게는 걷는 내내 신경이 쓰였다. 딱딱한 길에 실망은 있지만 공기가 정말 좋아 걷는 내내 양옆으로 보이는 초록의 싱그러움이 그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는 세상 어디서도 듣지 못 한 족히 10가지의 소리가 저마다 내게 말을 걸듯 여기서 울면 저기서 운다. 어디에서 또 온 건지, 이곳저곳을 새들이 날아다니며 흔드는 날갯짓 소리는 마치 한 곡의 왈츠처럼 경쾌하게 걷는 내내 심심하지 않은 길동무가 되어 주었다. 





정말 가을인가, 이 물결들이 좋다.
시멘트길에 당황했다. 하지만 공기가 좋아 용서했다.




막상 호수는 잘 보이지 않아 이 길이 맞나 싶었지만 내 마음을 어떻게 아는지, 그때마다 보이는 이정표에 따라 걷다 보니 저 멀리 왕곡마을이 보였다. '왕곡마을은 꼭 한번 와봐야지.' 했었는데 길을 걷다 보니 어느덧 입구에 도착했다. 지인분이 이곳에 살았는데 너무 아름다운 마을이라고 했다. 그때 놀러 오지 못해 아쉬웠는데 초입부터 핀 연꽃이 너무 반가웠다. 개구리 왕눈이가 홀짝홀짝 뛰어다닐 것 같은 내 손의 2배, 아니 4배가 넘는 큰 연잎들이 시원시원하게 뻗어져 있다. 





왕곡마을 입구를 알리는 연꽃
너무 보고 싶었던 너를 여기서 보는구나.




왕곡마을은 작은 개울을 끼고 있어 올라가는 내내 물소리가 들려 작은 숲 속 마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기와집과 초가집은 민속촌에서만 봤지, 이렇게 밀집한 마을을 만난 건 처음이다. 아직도 사람들이 실제로 생활하고 있고 숙박업도 있지만 깔끔하게 보존돼 있어 골목골목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혹, 어떤 사람은 볼 것이 없어 실망했다는 글도 봤지만 사람이 느끼는 건 다 똑같을 순 없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감정은 다를 수 있기에 선입견을 갖기보다는 가서 느껴보는 게 좋다. 한 뱃속에서 나와도 형제자매 성격이 얼마나 다른가. 화려함을 생각했다면 이곳은 맞지 않을 수 있다. 꼭 무언가를 찾고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 발걸음은 가벼울 것이다. 이때만이라도 '복잡한 마음은 내려놓고 이곳을 걸어보라'하고 싶다. 그러면 더 아름다운 길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어디를 가도 꽃과 열매와, 옛스러움이 공존한다.
따뜻하겠다. 하루 묵고 싶다.
정겨운 시골마을이다. 




대문 없는 개방적인 구조로 충분히 마을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여기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맞나'하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타임머신 타고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특히, 촘촘히 볏짚으로 쌓아 올린 초가집 군락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내 눈을 즐겁게 했다. 집 앞에 밤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호두나무까지 없는 게 없고 꽃들도 여기저기 흐드러져 있으니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나를 반갑게 맞이 해줄 것 같은 소박한 예스러움도 가득하다. 


왕곡마을 꼭대기로 올라가 전경을 보니, '눈 내리는 날' 이곳에 오고 싶어졌다. 소복이 눈이 쌓이면 크리스마스 마을로 변신할 것이다. 둥글둥글 초가에 쌓인 눈도, 기와에 소담하게 앉은 눈도 참 예쁠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겨울에 다시 한번 너를 만나고 싶다.





여기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다.
왕곡마을 위에서 본, 풍경이 참 고즈넉하다.
어디를 다녀도 따스함이 묻어있다.
내가 좋아하는 꽃, 해바라기





특히 이 마을은 영화 '동주'의 촬영지로 곳곳을 걷다 보면 안내글이 있다. 오래전 본 영화라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다. '흑백'이라는 독특한 감성으로 그려낸 시인을 꿈꾸는 '청년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 '윤동주'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한 편의 시'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친다.

 

아마도 내가 지금 이 길을 걷기에 이 시가 생각났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외웠던 몇 안 되는 시구절 중 하나인데 불빛도 없는 깜깜한 밤, 이곳에 있었다면 분명 별이 한가득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안내 줄 것만 같다. 





영화 '동주'촬영지
개울가, 빨래는 누가 널었을까





왕곡마을 지나 다시 둘레길을 걸으며 점점 황금물결로 변하는 길을 걷다 보니 성큼 '가을이 다가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이제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계절은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묵묵히 지나간다. 다시 내가 고개를 들 때쯤은 겨울이 찾아오겠지. 추운 겨울보다는 바람 부는 가을이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물면 좋겠다. 추운 날엔 내 마음이 더 닫힐 텐데. 


벌써부터 마음 한편에선 걱정이 조금씩 생겨난다. 이 걱정을 떨치기 위해 여행도 가고, 걷기도 하는데 아직도 진정하지 못하고 마음은 꿀렁거린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소소한 걱정들은 사라질 수 있겠지. 걷다 보면 생각이 단순해지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이렇게 계절이 바뀔 때면 여러 가지 엉킨 마음들로 생각이 복잡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내 감정이라 나쁘다 생각하지 않는다. 매일 바뀌는 내 마음이, 이제는 익숙하다.  

      




다시, 둘레길을 걸으며 
황금물결이 좋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둘레길 마지막쯤, 그동안 꽁꽁 숨어 있던 송지호가 시원하게 보였다. 어디에 있었는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넓은 얼굴이 나왔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호수가 유난히 파랗게 빛났다. 호숫길을 걸으며 버스를 타기 전, 전망대로 차 한잔 마시기 위해 올라갔다. '철새 관망대'로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 카페만 간다고 하니 "혼자니, 그냥 올라가세요." 하며 인사를 건네셨다. 잠시 천 원이라 낼까도 했지만 유쾌한 목소리로 감사하다며 올라가 커피 한잔 마셨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걸었던 감정에 대해 메모를 하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위에서 본 전망은 바다와 호수가 보여 나름 멋지지만 건물의 특성상 철근 구조로 답답함은 있다. 그래도 여행하면 꼭 전망대에서 그 도시를 바라다보면 가슴이 탁 트이고 내가 간 곳을 볼 수 있어 빠지지 않고 간다. 오늘도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캠핑장에 내려 비가 많이 내린 다음날이라, 두백산을 제외하고 왕곡마을까지 7Km 남짓 걸었다. 대부분 평지라 누구든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한번 걷기는 어렵지만 걷다 보면 또 길이 걷고 싶어 진다. 걸어야만 그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매일 걷는 지하철, 버스정류장만 가지 말고 조금의 여유를 느끼고 싶다면 다른 길을 걸으며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 보자. 처음부터 먼 곳을 가기보다는 가까운 곳부터 시작하면 지치지 않고 계속할 수 있다.





송지호가 얼굴을 내밀었다. 큰 소나무와 작은 소나무가 함께 
송지호관망타워
송지호 둘레길의 시작과 끝

걷는 TIP!  송지호는 약 6KM로 양방향으로 걸을 수 있고 천천히 걸으면 더 좋다. 왕곡마을 곳곳을 다니다 보면 1시간 정도 더 소요된다. 

YOUR 미션!! 옛 마을 '왕곡마을'을 느리게 느껴보자. 걷다 어디를 둘러봐도 포근한 마을에 눈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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