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너머엔 나릿골 감성마을, 해파랑길 32코스]
작년 봄, 코로나로 삼척 맹방의 유채꽃을 엎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올해는 괜찮을까. 관심을 갖고 꽃피는 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는 실망으로 이번에도 유채꽃 축제는 없었다. 막상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걸어볼까'하는 생각에 삼척의 멋진 바닷길인 '이사부길'을 찾았다.
그곳은 외곽으로 버스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웠다.
하루에 2대, 혹은 4대 다니는 버스를 어떻게 타고 다녀야 할지, 움직이는 동선이 꽤 길었다.
삼척은 강원도에서 면적이 5번째로 큰 도시다. 속초는 맨 뒤 18번째인데, 역시 하루는 무리일까.
여행이란 내가 욕심낸다고 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과감한 포기도 필수다.
꼭 오늘 다 봐야 하는 건 아니니까, 빼곡히 채우기보다는 조금은 부족한 여행이 좋다.
여운이 남을수록 기억도 남고 다시 오고 싶은 기대감을 갖기 때문이다.
삼척항 버스는 30분을 더 기다려야 해서 터미널에서 바로 택시를 탔다.
내리기 전, 기사님께 나릿골 입구의 안내센터와 이사부길 방향을 물어보니 뭘, 거길 가냐며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면 된다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여행지에서 택시를 타 기사님께 가끔 길을 묻는다.
소문난 관광지가 아니면 대부분 부정적인 말이 돌아온다.
이곳에 살면 매일 지나는 길이기에 무심할 수밖에 없다.
나도 속초에서 여행자들이 바다를 향해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에 무심코 지나치기에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별로인가'하는 찜찜함을 갖고 나릿골 마을 초입에 내렸다.
'바다, 마을, 감성'을 연결하는 도시재생사업으로 다시 탄생한 마을이기에 첫 감정 그대로 기대감이 컸다.
이른 도착으로 안내센터는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앞에 안내지도만 있어 하나 챙겨 걷기 시작했다.
감성마을 나릿골 지도는 희망길, 추억길, 바람길, 바닷길로 나눠 있고 중간에 '핑크 뮬리'가 있어 굉장히 핫한 마을이다. 아마도 이 공간 때문에 마을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첫 시작인 '희망길'은 벽화와 안내표시가 계속 있지만 중간중간 이정표가 미흡하다. 또한 별다른 볼거리는 없고 높이 올라갈수록 깊은 바다가 보여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동해 논골담 벽화마을처럼 아기자기함은 없다. 대신 무서운 개들이 집 앞을 지키며 어찌나 짖어 대는지 가는 길을 멈춰 세 번을 돌아 내려갔다.
중간중간을 내려가고 오르며 바람길에 오르니 감성을 자극하는 빛바랜 '핑크 뮬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고 앉아 쉴 곳도 있는 배려의 공간이 있다.
동네분들이 내 모습을 보고 인상을 쓰지 않게 이곳만 '감성공간'으로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 짖는 소리, 가끔 만나는 주민들의 시선은 결코 반가운 얼굴이 아니어서 걷는 내내 불편했다.
그들의 생활터전인 이곳은 낯선 사람들의 걸음이 민폐일 수도 있어 무조건 개발만이 답은 아닌데.
누구를 위해 이 공간이 여기 들어선 건지, 마을 모습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걷고 싶었던 바닷길, 바람길을 지나 삼척항부터 이사부 길의 시작이다.
넓은 이사부 광장을 지나 강원도의 상징인 굽이굽이 바닷길을 따라 4.7KM를 걷는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새천년 해안도로 '이사부길'은 2017년 미개통으로 남았던 약 800M 구간의 군경계 철책을 보행 테크로 완전히 개통했다.
삼척시 해안길의 시작점으로 원덕읍까지 약 104.5KM에 이르는 해안선을 연결하는 명품 해안길로 조성 중이다.
'이사부길'의 유래는 동해왕 이사부 장군의 해양개척 정신을 기렸다.
이사부는 신라 지증왕 13년(서기 512년) 지금의 삼척인 실직국의 군주로서 우산국(울릉도와 독도)을 최초로 정벌하여 우리 영토에 편입시킨 역사적 인물이다.
국토 종주(고성) 동해안 자전거길이기도 하고 해파랑길 32코스이기도 한 바닷길은 걷기에는 더없이 좋다. 차로 이 길을 다녀왔다면 실망스러울 수 있다. 걸어야만 이 길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오르막길은 잠시 거들뿐, 계속 이어지는 평지는 천천히 걷기 좋다. 가는 동안 소망의 탑, 조각공원, 두꺼비바위 등 소소한 볼거리가 있고 후진항까지 지나면 최종 목적지인 삼척 해변이다.
오랜만이다. 파란 바다를 봤다. 덩그러니 바다만 있었는데 의자도 많고 쉼의 시간을 갖기 좋다.
이번 여행은 '예수상'으로 유명한 성내동 성당이 마지막 장소다.
브라질의 예수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그 성스러움만은 같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다시 택시를 탔다. 2004년 12월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성당은 고딕 양식 형태로 건물과 정원을 보는 재미가 있다.
누군가는 성당에서 조용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괜히 지나치면 마음이 쓰여 나도 모르게 때론 간절한 기도를 하기도 한다.
터미널로 가기 전, 성당 옆에 있는 죽서루에 잠시 들렸다. 성곽을 지나니 바로다. 걷는 길 옆 노부부가 여행 왔냐며 먼저 다가와 물으셨다. 성당길이라 그런가. 낯선 만남이 따듯하다.
외국 여행은 다른 국적 사람들과 대화도 잘하는데 오히려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을 다니다 보면 더 입을 닫게 된다. 때론 말을 하고 싶어도 점점 삭막해져 가는 세상에 나 또한 자꾸 뒷걸음을 친다.
이번 여행은 걷기로 시작해서 걷기로 끝났지만 오히려 몸이 피곤하기보다는 어두워지는 밤이 되어도 가볍고 상쾌하다. 밤새도록 걷고 싶은 날이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걷다 보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질 때가 있다. 아마도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잊었기 때문일까.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리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듯 포기도 필요하다. 그 포기는 걷다 보면 하게 된다. 극한의 상황이 오면 사람은 욕심을 버린다고 한다. 그 욕심은 결국 끝나야 내려놓게 된다.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때론 '도레미파솔라시도시라솔파미레도'로 아름답게, 슬프게, 밉게, 이쁘게 춤을 춘다. 그 춤들이 항상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내 마음 감옥에서 모두 내보내고 싶다. 이길, 저길, 또 다른 길을 걸으며 하나, 둘씩 내려놓으며 더 가벼워지는 날까지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