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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뻬릴 Jul 09. 2021

[일본 잡화점] 도쿄 키치죠지역 - 가공스토어

땅을 잃은 세대가 연 가짜 상점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산업은 금융이며 금융의 본질적 동력은 판매될 수 없는 것, 그중에서도 미래의 창조 가능성을 현재의 교환가치로 환원하는 데 있다. 금융자본주의 경제질서 속 창의력을 지닌 젊은 세대가 생산성의 발로로 되돌려 받게 될 금전적 대가는, 금융 상품화된 지대(rent)의 상승 속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려져 기성세대 유한계급의 배를 불리는 데 기여하고 만다. 높은 임대료와 독점된 유통망, 살인적인 수수료로 인해 잠재 고객과 연결되지 못한 채 생산자의 꿈을 포기하는 젊은 층이 어느 국가의 대도시에서나 발견된다. 지나치게 비관적인 시선일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많은 개인 창작자들이 이 분석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국내외에서 창조적 생산자와 소비자들을 연결짓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이나 커미션 중개업체, 상품 판매 앱의 활용까지. 그 다양한 사례들 중 아마도 가장 오프라인과 깊게 연결된 형태가 위탁판매 상점일 것이다. 지역의 창작자가 창작물을 맡기면 판매자는 판매 후 일정 정도 수수료를 가져간다. 위탁판매 자체는 역사도 오래됐고 흔한 사업 방식이다. 다만 근 몇 년 사이 소규모 예술가들의 작품 위탁 판매가 더욱 활성화된 것으로 보인다. 창작자 개인이 상점 하나를 채울만한 상품을 다 생산하기도 어렵거니와 임대료를 혼자 감당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위탁판매 점포는 창작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작은 활로가 되어줄 수 있다. 손님들 역시 충분한 상품 선택지를 보장 받음으로써 방문할 동기를 얻는다.


가공스토어 전경. 이 사진도 꽤나 옛날에 찍힌 모습이다. 현재 외관은 어느 중소기업의 서류 창고같다.


유명 만화 원작의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성씨로 잘 알려진 이노가시라 공원의 남쪽, 이노가시라공원길의 주택가 사이에 숨어있는 가공스토어는 가장 냉담하면서도 절실한 형태의 위탁 판매상점이다. 가게의 이름인 가공부터가 현실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 속의 무언가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가상의 상점이라기엔 점포(겸 창고)도 버젓이 존재하고, 온라인샵도 계속해서 운영하며 세금도 내고 있지만 말이다.


구글 검색 결과를 참고할 때 가공스토어도 개점 초기에는 다른 액세서리, 문구류 상점처럼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디스플레이를 자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방문했던 2018년 초의 건물은 이미 매장과 창고의 경계 사이에 있는 무엇이 되어 있었다. 작은 공간은 한 칸 한 칸의 높이만 다르고 종류는 같은 파일 캐비닛으로 가득 차 있다. 가운데에는 서서 쓸 수 있는 검색용 컴퓨터 한 대가 놓여있는데, 이 컴퓨터에 원하는 상품의 장르나 창작자의 이름 등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러면 판매 중인 상품의 이미지 파일이 나타나고 해당 상품이 캐비닛 어느 칸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M열의 2번째 칸이면 M2, H열의 6번째 칸이면 H6 같은 식이다. 그 광경은 마치 지하철 구석의 코인로커를 방 하나에 최대한 구겨넣은 모습이었다.


처음 가공스토어를 방문했을 때는 상품을 판매 중인 점장조차 커튼 뒤에서 보이지 않아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는지를 스스로 의심할 지경이었다. 겨우 발걸음을 점포 안으로 집어넣었더라도 캐비닛만 가득한 내부를 보고 돌아나가지 않을 여행객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하여 캐비닛 하나를 소심하게 (나름 주인 몰래) 열어본 이후에야 이곳이 상점인 줄 알 수 있었다. 그 후엔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검색용 컴퓨터는 아예 필요도 없었다. 각 칸마다 창작자의 개성이 뚜렷이 드러난 아이템들이 가득해, 보물찾기 하듯 모든 캐비닛을 열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나비 모양 메모장과 화려한 식물 문양의 마스킹 테이프, 각종 색지와 스티커를 구입하고 나니 만 엔 넘는 지출에 (역시 주인 몰래)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별자리를 금박으로 입힌 두꺼운 색지. 품명은 기라성지(綺羅星紙)다. 한 묶음 여섯 장을 모두 나눠주었다(3rd Jan. 2021).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인테리어에 오프라인 점포의 영업시간도 한 주에 10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는 가공스토어의 모습은 오늘날 젊은 창작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어떻게든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불확실한 사업성에도 불구하고 네트워킹을 시도한 가공스토어의 점장이 대단하게만 느껴진다. "연대를 구하여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던 전공투(全学共闘会議, 전학공투회의의 줄임말)의 구호가 새삼 떠오르는 한편으로, 위태로운 존재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이 못내 안쓰러웠다.


안타깝게도 가공스토어의 오프라인 매장 겸 창고는 2019년 말엽부터 운영하지 않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온라인이라는 대체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오프라인에 창작자들의 뿌리내릴 곳이 있기를 희망한다. 중산층 이하의 젊은 생산자들을 몰아낸 도시는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쉽게 극단화되고 그곳에선 자본의 입맛에 맞는 뻔한 유행만 반복된다. 간혹 서툴기도 하지만 과감한 창작물이 교류되는 장소들이 늘어날수록 진부함과 몰가치함에 대항하는 땅 위의 진지가 또 하나 확보되는 것이다.


일본에 몇 차례 방문하는 동안에도 도쿄 외의 지역에서 위탁판매 점포를 흔하게 보지는 못했다. 충분한 양의 공급과 수요를 확보할 수 있는 배후지 조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리라. 가공스토어는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경험을 하게 해 준 너무나도 '현실적인' 상점이었다. 가공스토어가 다시 오프라인 매장을 개점했으면 좋겠지만 현재는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조금 아쉽더라도 온라인숍과 트위터를 주목하는 것으로 관심을 달래 보는 것이 좋겠다. 



가공스토어(架空ストア)

현재 오프라인 점포 운영하지 않음

홈페이지 : https://store.retro-biz.com

트위터 : https://twitter.com/quaqoostore

위치 : 4-chōme-26-7 Inokashira, Mitaka, Tokyo 181-000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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