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군대 가는 아들이 머리를 밤송이처럼 깎고 왔다.
“엄마 원장님이 이발 비를 안 받으세요.” 집 앞에 위치한 미용실 원장님이 아들의 머리를 깎아 주고 고맙게도 그냥 보낸 것이다. 따뜻한 엄마의 마음으로 손질했을 원장님의 진심이 느껴져 짧은 머리가 더 다정해 보였다.
며칠 후 군대를 보내 놓고 조금은 한가해진 마음에 거울을 보니 철분이 부족해서인지 머리의 고랑마다 희끝하게 새치들이 올라와 자라기 시작했다. 보기 싫어 안 되겠다 싶어 염색 예약을 하고 음료수를 사들고 미용실에 갔다.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파마약을 뿌리고 구루푸를 머리를 말은 채 앉아 계셨다. 할머니 한분은 이제 막 예쁘게 꼬불꼬불한 파마머리를 끝내고 일어서고 계셨다. 할머니는 머리가 맘에 드시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셨다. 그런 후 수다스러운 얘기를 다른 아주머니와 주고받다가 크게 웃고 다시 웃다가 갑자기 우신다. 슬쩍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우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자 원장님은 살짝 다가와 내 귀에 속삭여 줬다. 사흘 전 65세인 아들이 결혼식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뇌를 크게 다쳐 의식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아들이 누워 있는데 웃음이 나오는 '내가 미친년'이라며 계속 훌쩍거리며 우신다. 그러자 두 번째로 막 파마머리를 마친 아주머니가 우는 할머니 옆으로 가서 휴지 한 장을 건네며 “언니 산사람은 살아야죠. 기운 내세요!”라며 위로를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어깨를 주무른다. “지금은 지켜보는 것 밖에 , 할 수 없는 게 없당게!”라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할머니는 말한다. 뼈만 앙상하다며 어깨를 주무르던 아주머니는 언니가 건강하셔야 아들도 금방 회복될 거라고 위로하며 힘을 주고 있다. 할머니와 아주머니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얘기해서 지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처럼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이란다.
집에 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바로 건너편 차도에 있는 플라워 꽃집이다. 이곳은 큰아들 학부모 협력 동아리 모임으로 꽃꽂이를 3년 동안 배웠던 곳이기도 하다. 꽃집 앞에 공터가 있었는데 공터를 텃밭으로 개간하여 감자며 상추, 배추를 심어 회원들과 함께 가꾸어 제법 수확을 얻기도 했었다. 이제나 저제나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작은 봄꽃을 하나 사려고 들렸다. 꽃이나 초록 새잎이 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이미 내 가슴은 환하게 봄꽃으로 물이 든다. 봄이 되면 새 잎들은 수줍었던 그 어떤 욕망들을 모았다가, 줄기를 타고 용기 내어 하나의 잎들을 만들고 꽃을 피우는 것 같다. 그러면서 희망을 속삭이는 것 같다. 나는 조용히 꽃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옆 다육이에 핀 빨간 꽃이 예쁘기도 하고 조화 같아 살짝 만져 보았다. 그런데 그만 하얀 가시가 손에 박히고 말았다. “앗 따가워!” 나는 순간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분명 손가락 속살에 박혀서 따가운데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 어쩌지!” 하고 있는데 그곳에 있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이리 오세요’하며 팔을 이끈다. 그러더니 꽃집 사장님께 가시를 빼게 칼을 좀 달라고 한다. 나는 무서워서 안 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따끔거리니 눈을 질끔 감고 손을 내밀었다.
“아니 애도 아니고 무슨 이런 걸 무서워하세요! 애 키우니 이런 것은 일도 아니더구먼!” 이렇게 말한다.
실눈을 뜨고 공중에 내 손가락을 높이 쳐들더니 하얀 솜털처럼 생긴 가시를 쏙 빼낸 것이다. “헐 이럴 수가!”
처음 만남인데 스스럼없이 사람에게 다가와준 것도 신기하고, 훨씬 연장자인 나를 애 다루듯 이끌고 가 햇빛 아래 손가락을 비춰보며 가시를 빼준 것은 더 신기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눌 경우, 서투르고 서먹한 분위기와는 달리 속으로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 지구 상에는 36억인가 하는 많은 사람 살고 있다는데, 지금 그중의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우선 만났다는 그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하늘 밑 똑같은 언어와 풍속 안에 살면서도 서로가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법정스님)
오늘 나는 봄을 만났다.
쓱쓱 머리카락을 밀고 자르며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라고 응원하는 미용실 원장님을 통해 넉넉한 봄의 마음을 느꼈다. 처음 만났지만 허망한 마음을 받아주며 힘 있는 위로를 건네는 넉넉한 엄마들의 모습도 만났다. 척박한 대지의 물을 자연스럽게 끌어올리는 봄의 나무처럼,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에게도 귀를 대고 들어주며 가시를 빼준 감사하고 친절한 따뜻한 마음도 만났다. 봄을 닮은 사람들. 그리고 목련처럼 환한 미소가 예쁜 군에 간 아이. 나는 조용히 봄과 같은 날들이 모두에게 계속되기를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