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자란 유일한 사람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누구도 줄 수 없는 위로가 되더라고. 술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아빠와 그 모든 걸 감내하고 희생한 엄마 밑에서 말이야. 나는 매 순간 아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애썼고 혼자 동동거리며 집안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엄마에게는 짐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였겠지. 내가 외동이었으면 억울했을 거야. 우울한 가정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잖아. 그 모든 공기를 완벽히 이해하는 사람이.
하지만 나와 오빠는 성별만 다를 뿐 아니라 관심사도 다르고 나이도 세 살 터울이라 내가 중학생이 되면 오빠는 고등학생이 됐고 내가 고등학생이 되면 오빠는 대학생이 되면서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어. 오빠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부터 우리의 대화는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 같아. 사춘기를 겪으면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가출하는 오빠를 나는 이해하지 못했어. 점점 성적이 떨어져서 부모님께 혼나는 걸 보면서는 난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했지. 오빠를 반면교사 삼은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랑받는 딸이 되었어. 그런 내가 오빠는 얄미웠을 것 같아. 오빠가 걸어간 길을 보면서 내 살길을 찾았으니까. 우리 둘 다 초등학생일 때 같이 집에서 놀다가 장독 깨뜨렸을 때 내가 그랬지. “오빠는 늘 아빠에게 혼나니까 이건 오빠가 깬 걸로 하면 안 돼? 난 아빠 무서워.” 허망한 표정의 오빠 얼굴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아. 난 그렇게 이기적이었는데.
나중에 들었어. 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지방에 일하러 간다면서 두 달 정도 집에 안 들어오신 적이 있어. 아빠는 그전에도 막노동을 하면서 지방을 왔다 갔다 한 적이 많았으니까 그런가 보다 했지. 오빠가 엄마에게 그렇게 말하자고 했다며. 나 고등학생이고 곧 수능이니 신경 쓰게 하지 말자고. 아빠는 경찰 단속에 걸린 거더라. 음주운전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고 횟수만큼 늘어난 벌금을 다시 한번 낸다는 건 우리 형편에 맞지도 않는 일이었어. 벌금을 낼 수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지. 난 정말 아빠가 일하러 간 줄 알았어. 아빠가 처벌을 받고 있는 동안 엄마와 오빠는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평온하게 지냈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엄마가 말해주더라.
오빠 대학 원서 넣을 때도 공부를 못해서 집 앞에 있는 전문대 간 줄 알았지. 오빠는 괜찮으니까 동생이 원하는 대학 가게 해주라고 엄마한테 얘기했다며. 자기는 돈 많이 안 들어도 되는 대학을 가겠다고. 집에서 다닐 수 있으니 생활비도 따로 안 들고 좋지 않냐면서. 사실 그 성적이면 다른 지역에 갈 수 있는 4년제 대학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오빠는 그런 선택을 했더라. 나는 내가 잘나서 좋은 학교 간 줄 알았지. 오빠도 집이 싫었잖아. 멀리 도망쳐서 살고 싶었잖아. 난 대학 다니는 동안 집에서 멀어져서 행복했는데 오빠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몇 년을 아빠와 부딪쳐야 했어.
오빠는 그 많은 말들을 어떻게 다 삼키고 살았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원망도 미움도 공치사도 없이.
대부분 여자들은 자기보다 나이 많고 친한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잖아. 나는 그게 참 어색하더라. 그래서 아무리 가까워도 선배라고 부르거나 직급으로 부르고 이도저도 안 될 때는 호칭을 하지 않아. 나보다 네 살 많은 남자친구한테도 오빠라는 말은 잘하지 않았어. 나한테는 친오빠가 있으니까. 내가 오빠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진짜 오빠 한 사람뿐이라서.
이 편지를 오빠에게 부칠만큼 용기는 나지 않아. 만약 오빠가 이 글을 본다면 우리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고개를 돌리겠지. 우리가 마음을 나누는 정다운 사이는 아니니까. 이 편지는 어쩌면 오빠의 그늘 뒤에 숨어서 아픔과 슬픔을 피하던 어린 내가 보내는 미안한 마음인지도 모르겠어. 나의 방패가 되어주던 열아홉의 오빠에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