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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좋아하세요?

무엇을 취향이라 부를 수 있는가

by 한걸음

커피 좋아하죠.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케냐 AA, 파나마 게이샤 약중배전으로 볶은 원두가 좋아요. 과일향과 꽃향을 지닌 산미 있는 커피는 와인을 마시는 것 같은 풍미를 주기도 하거든요. 고소한 원두도 좋은데 선택지가 있다면 역시 산미 있는 커피를 고르게 되더라고요. 입안에 가득 퍼지는 향이 잘 지은 저택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죠.

요즘 커피도 비싸니까 원두를 사다 집에서 드립 해 먹어요. 배운 적은 없지만 카페에서 커피 내리는 걸 보니 뜨거운 물을 살살 부어놓고 20~30초 정도 뜸을 들이더라고요. 그걸 두 번 반복하고 내리기도 하고 한 번만 뜸을 들인 후에 내리기도 하죠. 원두가 뜨거운 물을 머금고 내뱉기 위한 시간을 주는 거예요. 물을 콸콸콸 부어버리면 원두가 부풀어 오를 시간이 없거든요. 콜드브루용으로 원두를 잔뜩 갈아서 통에 넣어두고 8~9시간을 들여 원액을 추출하기도 해요. 이건 변변찮은 원두로 해도 평균 이상의 맛이 나와요. 추천합니다.

전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휴직하기 전까지는요.

직장생활 17년 차인데 며칠 휴가 쓰는 거 말고 휴직을 한 적은 없어요. 번아웃과 우울증이 같이 왔어요.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웠어요. 휴직을 한다는 건 실패했다는 증거 같았거든요. 그리고 우리 직장이 그래요. 질병휴직한다고 하면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보는데, 선의도 있지만 소문을 내기 위한 호기심도 있어요. “우울증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것도 혀가 타들어가는 것처럼 힘들었어요. 다른 사람이 정신과 치료받는다고 하면 “많이 힘들었구나, 괜찮아. 요즘은 정신과 진료 보는 거 대단한 일도 아니야. 아프면 치료받는 게 당연하잖아.”라고 진심으로 얘기해 주겠지만, 스스로에게는 그게 적용이 안 돼요. 내가 이렇게 진단을 받고 약을 먹을 정도로 망가졌나 하는 마음이 먼저 오거든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진해서 간 부서에서 하는 일은 전에 하던 것과 결이 완전히 달랐어요. 정해진 게 없어서 새로 만들어가야 했고 아주 중요한 일도 많고 중요하지 않지만 놓치면 안 되는 사소한 일도 깨알같이 많았어요. 근무시간에 팀원들과 말할 시간조차 없었어요. 초과근무도 잦았고 주말엔 늘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해야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죠. 내 의견과 전혀 상관없이 정치적인 결정이 이루어질 때도 많았는데 나의 가치와 상충하지만 그 결정에 대한 근거를 만드는 것 또한 제 일이었어요.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결정에 대해서 그럴듯한 이유로 포장하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는 논리가 남에게 제대로 설명이 될 리 없잖아요.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는데 풀리지가 않았어요. 운동을 하면서 땀을 흘려도, 친구들과 맛있는 걸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도, 직장 동료들과 둘러앉아 푸념을 해도, 집에서 충분히 쉬어도 해소가 되지 않았어요. 전에는 잘 듣던 해결책들이 하나도 먹히지를 않더라고요.

버티는 게 답은 아닐 테고 살려면 휴직해야겠다 싶었어요. 일을 할 수 있는 몸과 마음 상태가 아니라는 걸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휴직하고 쉬는 6개월 동안 커피를 마신 게 손을 꼽을 정도예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나 지인을 만나서 한잔씩 마시긴 했지만 혼자 있을 때 커피가 생각 난 적은 없어요.

6개월의 쉼을 마치고 복직을 한 저는 다시 매일 커피를 마시고 있습니다. 일을 하는 동안 커피를 마셨던 건 각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커피의 맛과 향을 즐겼다기보단 깨어 있는 상태를 억지로 만들어야 했던 거죠. 좀 슬프더라고요. 내가 정말 원해서 만들어진 취향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요.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버티기 위해 만들어진 취향 말고, 휴직 기간처럼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을 때 내가 찾아가는 곳은 어디인지 내가 선택하는 건 무엇인지. 저는 그게 정말 내 취향일 거라고 생각해요.

커피를 내릴 때 뜸을 들이듯이 휴직 기간은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머금고 뱉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원두를 부풀리기 위해 들이는 20~30초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따뜻한 물이 원두 속까지 침투할 수 있게 도와서 그 안에 있는 캐러멜 향, 초콜릿 향, 꽃 향과 과일 향을 끌어내듯 나에게도 숨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거였어요. 앞으로는 일을 하더라도 나에게 시간을 주고 가끔씩 뜸을 들이면서 내가 품고 있는 향은 무엇인지 기다려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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