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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것들의 행방

지구반대편에서 내 옷을 만난다면

by 한걸음

내가 버린 옷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중고등학교 내내 교복만 입고 다니다가 대학생이 되니 옷에 관심이 생겼어요. 대학생이 돈이 어디 있나요? 저렴한 옷을 사서 입고 버렸죠. 싸게 산 거니까 버리는 것도 쉬웠고요. 의류 수거함에 넣으면 또 누군가 입겠거니, 그렇게 자원이 순환되겠거니 생각한 것도 있죠.


2019년 여행으로 남미에 갔다가 볼리비아에 며칠 머문 적이 있어요. 남미에서는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나라로 알려진 곳인데 수도 라파즈부터 심상치 않더군요. 공항 근처이고 여러 나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도시인데도 곳곳이 폐허 같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도로는 깨끗하지만 주택가로 들어갈수록 짓다 만 건지 철거를 하는 중인건지 모를 건물들이 즐비했고 폐자재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더라고요.


라파즈에서 다음 목적지인 우유니 사막으로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있었는데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친구와 급하게 반일투어를 하기로 했어요. 가이드로 나온 사람은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현지인이었어요. 황폐한 도시의 모습과는 달리 가이드는 청바지에 가죽 장화,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꽤 잘 차려입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라파즈에서 가장 유명하고 독특하다고 알려진 케이블카를 타고 도시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라파즈는 해발 3,830m에 위치해 있는 데다 마을마다 높이 차이가 커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요. 윗동네에서 아랫동네로 다다다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많이 보았지만 고산지대에서는 아무래도 무리죠. 그래서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케이블카가 대중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어요. 노선별로 색깔이 다른 것도 비슷하죠. 케이블카에서 내려 중간중간 마을에 들르기도 했는데 그중 한 곳은 ‘엘 알토’라는 이름이 붙은 시장이었어요. 가이드는 시장을 설명하면서 “이곳에 가면 옷이 많아. 전 세계에서 팔리지 않은 옷도 택을 그대로 단 채 이 시장으로 들어오는데 새 옷도 저렴하게 살 수 있고 빈티지 제품도 꽤 괜찮은 것들이 많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다 이 시장에서 산 거야.”라고 말했어요.


높은 언덕에 위치한 시장에는 정말로 옷들이 많았어요. 천막부스로 차려진 가게마다 산더미처럼 옷이 쌓여있었습니다. 옷더미와 옷을 고르는 사람들, 시장 상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컸어요. 그 크기에 압도당해 구경할 엄두조차 나지 않더군요. 그런 저를 보고 가이드는 “물건이 많은데 안 사? 마음에 드는 게 없어?”라고 물었습니다. 가이드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알고 있었을 거예요. 여러 나라에서 처치 곤란인 옷들이 이곳으로 모였고 결국 경제적 사정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요. 역사를 전공했으니 자기 나라에 대해서 많이 알 테고 자부심도 있을 텐데 저 사람은 이 옷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싶었어요. 괜찮은 옷을 저렴하게 사니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 소화하지도 못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을 끌어안고 싶지는 않겠죠. 충격적이더라고요. 소위 선진국이라 부르는 국가들이 자기가 감당 못 할 물건을 만들고 이런 저개발국으로 밀어낸다는 사실이요. 말이 좋아 수출이지 사실 버리는 거잖아요.


결국 만들어졌지만 팔리지 않는 옷, 사람들이 입다가 버린 옷들이 이 나라에 모여있었어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이 시장 어딘가에 내가 버린 옷들도 있다는 것을요. 내가 헌 옷 수거함에 넣은 것들은 누군가 다시 입기는 어려울 정도로 해진 것도 있었고 막상 샀지만 맘에 들지 않아 두어 번 입은 새 옷도 있었어요. 우리나라 안에서 그것들이 순환하고 재활용되는 줄 알았는데 배를 타고 전 세계로 흘러들어 갔던 거예요. 2024년 12월부터 2025년 1월까지 연재한 한겨레 21 ‘헌 옷 153벌 GPS 활용 추적기’ 기사를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어요. 2024년 넷플릭스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지금 구매하세요: 쇼핑의 음모’도 볼만합니다.


값싸게 입고 버린 옷이 남의 나라를 더럽히고 있었어요. 내가 버린 것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종착지에 와 보니 어마어마한 헌 옷 수거함이 되어 낯선 도시를 점령하고 있더라고요. 내가 버린 것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진 걸까요? 결국 그건 우리가 사는 지구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어요. 보지 못할 뿐 없어진 건 아니죠. 여행을 하면서 마냥 즐겁다, 좋다 생각했지 어떤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은 없어요. 하지만 라파즈는 도시의 모습 자체로 저에게 충격을 주더군요.


이제는 잘 사지 않고 잘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내가 버린 걸 남이 재활용해주길 기대하기보다 가능한 내 선에서 해보자 마음먹고요. 뭘 사기 전에는 오래 고민하고, 일단 샀다면 오래 쓰자 다짐해요. 내가 버린 것들이 결국 어디로 가는지 알게 되고 나서는 조심스러워졌어요. 자원 재활용이라는 이름의 쓰레기가 남에게 독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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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