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에게 두 손 두 발 든 친절의 도시

(11) 파리

by Lanie

이제 일기는 숙소에서 쓰기로 한다. 중간중간 카페나 공원에서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돌아다닐 땐 뭐니 뭐니 해도 두 손 가벼운 게 최고다.


밤버스를 타고 9시간을 달려 뉘른베르크에서 파리로 넘어왔다. 어디서든 잘 자는 사람이라면 밤버스는 유럽여행에서 정말 훌륭한 교통수단이다. 저렴한 가격에 그냥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먼 도시에 훌쩍 도착해 있는데, 그러면서 하루이틀 숙박비도 아낄 수가 있다.


독일이라면 그래도 자신이 있는데, 파리로 넘어와서는 살짝 겁을 먹었다. 처음부터 짐을 끌고 대중교통을 시도할 자신이 없어 우버 택시를 불러 호텔로 갔다. 사실 택시도 약간 겁을 먹기는 했는데, 택시비도 생각보다 괜찮았고 기사아저씨도 친절했다. 우리 호텔이 있는 골목은 일방통행길이었고 기사 아저씨는 반대로 진입을 하셔서 골목까지 들어가지 않고 내려주실 줄 알았는데 글쎄 엄청난 후진 스킬로 호텔 바로 앞까지 친히 데려다주시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짐만 맡기고 나갈 계획이었다. 로비에서 좀 쉬며 맡길 짐과 들고 다닐 짐을 정리하고, 화장실도 이용하고, 옷도 갈아입고 얼굴도 좀 다듬었다. 그리고는 짐을 맡기고 체크인을 하려고 보니 글쎄 우리의 예약 정보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애플리케이션에 예약된 정보를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지금껏 우리가 마음껏 로비를 이용한 이 호텔이 아니라 바로 다섯 걸음 떨어진 옆집 건물이 우리 호텔이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런데 직원은 친절하게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우리를 친히 옆 호텔로 안내해 주었다.


파리가 이토록 친절한 곳이었나? 택시 아저씨도, 잘못 들어간 호텔 직원도 모두 친절했다.


알맞은 호텔에 우린 오전 10시쯤 도착을 했고, 감사하게도 얼리 체크인을 허락해주셨다. 다만 우리가 0층 방을 쓸 의향이 있다면. 거리 뷰의 창문 대신 안뜰 테라스가 있고 로비층이기 때문에 약간의 소음을 감안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밤새 버스에서 지낸 우리는 지금 호텔방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그것쯤이야 상관없었다.


호텔 방에서 다시금 정돈을 좀 하고 나갈 채비를 했다. 이번엔 하루이틀이 아닌 그래도 세 밤을 같은 곳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짐을 푸는 것이 기분이 좀 더 좋았다. 파리는, 어쩌면 파리라는 이유로 4일이나 머무르는 일정이었으나 그 4일 동안 계획한 것이라고는 오르세 미술관과 몽마르뜨 밖에는 없었다. 9년 전 유럽 패키지여행을 통해 파리를 들렀기 때문에 에펠탑 오르기와 루브르 박물관 관람과 센느강에서의 유람 등 핵심 관광 코스는 이미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월요일이라 오르세는 휴관이었고 하나 남은 계획인 몽마르뜨에 가기로 했다. 우리 호텔에서 걸어서 45분 정도. 막 도착한 파리의 거리 구경 겸 걸어가보기로 했다. 아침은 가는 길에 보이는 카페에서 먹기로 했다. 파리는 정말이지 카페 천국이었다. 갑자기 파리와 서울 중 어디에 카페가 더 많을지 궁금해졌다. 인스타그램에서 파리의 거리 카페 사진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그런 카페가 어느 거리에나 이렇게나 많이 펼쳐져 있을지는 몰랐다. 다른 나라 도시를 여행할 때 주로 느끼는 것은 서울에서처럼 커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는데 왠지 파리는 서울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자료를 찾아봤다. 파리에는 카페가 약 15,000개가 있다고 하고(statista, 2020) 서울에는 카페가 약 25,000개 있다고 한다(한국경제, 2022). 역시 서울을 뛰어넘는 도시는 없군! 그러나 파리 면적은 105.4 제곱 km이고 서울은 605.2 제곱 km이다. 그렇다면 면적 당 카페 수는 1 제곱 km당 파리에 142.3개, 서울에 41.3개가 된다. 파리가 압승이다! 물론 서울은 주로 식당, 커피숍, 술집의 역할이 분리되어 있는 반면 파리의 카페들은 대체로 식당, 커피숍, 술집 역할을 모두 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이 점은 감안해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어쨌든 커피 한 잔으로 자유로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멋진 장소가 파리에는 그렇게 곳곳에 있다.


나는 더 먼저 보이는 카페에 앉자고 했는데 엄마는 좀 더 가보자고 했고, 그렇게 좀 더 걷다 엄마가 고른 카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아침식사로 12.5유로에 커피, 크로와상, 샐러드, 달걀프라이, 베이컨, 오렌지주스를 제공했다. 우린 이방인으로서 마치 영화를 보듯 처음 들어간 파리의 카페 안을 관찰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남성들만이 있었다. 할아버지들과 아빠와 아들과 그의 삼촌. 할머니들과 아주머니들은 다 어디에 간 것인지? 나중에 파리지앵 친구에게 물어보니 보통 “오후”가 여성들의 시간이며, 그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아무튼. 서로 대화를 나누는 혼자 온 할아버지들은 단골이자 이웃들이라 서로 아는 사이일까, 혹은 방금 처음 만난 것일까?


훌륭한 아침식사를 한 파리의 카페


다시 이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신선한 날씨, 약간의 우중충함이 파리와 오히려 잘 어울렸다. 아무래도 무채색의 통일된 스타일의 건물들 때문에. 우리 여행에서의 날씨 규칙은 아직껏 잘 지켜지고 있다. 맑았던 슈베비슈 할, 흐렸던 임멘슈타트, 다시 맑았던 뮌헨, 흐렸던 아우크스부르크, 맑았던 프라하, 흐렸던 드레스덴, 그리고 맑았던 뉘른베르크를 지나 흐린 파리에 있다. 파리의 이 흐림은 너무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파리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언덕배기, 그러니까 몽마르뜨로 추정되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막길이 시작되자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고 그 기념품들은 생각보다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것 구경하는 삼매경에 빠지다가 소매치기를 당하는 상황이 충분히 그려졌다. 그러나 반나절 겪은 파리는 생각과 다르다. 불친절과 소매치기의 도시일 줄 알고 꽤 긴장했었다. 콧대 높은 파리지앵들이 영어는 들은 채도 안 할 것이라거나 그런 것은 다 옛날 얘기인가? 파리지앵들은 우리를 매우 인격적으로 대해주었다. 우버택시 아저씨와, 잘못 들어갔던 호텔의 직원과, 잘 들어간 호텔의 직원과, 아침 식사한 카페 주인 모두가 우리에게 친절했다. 한편, 우리는 파리지앵들의 원래의 삶을 보고 싶기도 했는데, 마주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관광객이라 생각보다 그러기가 어려웠다. 이것 또한 후에 파리지앵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이미 파리는 관광객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도시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현재의 파리지앵들의 친절은 자포자기의 친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광객을 반기지 않음에서 나왔던 불친절이 소용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기념품 거리로 돌아오면, 우리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즉석사진 모양의 엽서, 손가방, 베레모 등이었다. (나중에 내려갈 때 ) 일단 쇼핑은 미루고 계속해서 오르니 빈티지한 회전목마가 관광객들을 반기고 있었으며 넓은 잔디 언덕과 사크레쾨르 성당의 풍경이 펼쳐졌다. 계단 군데군데에 사람들이 앉아 파리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도 여느 관광객이 되어 지나온 파리의 거리를 뒤돌아 내려다보았다. 사크레쾨르 성당 내부까지 둘러보고 나오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배가 아픈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성당 바로 앞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화장실만 따로 이용하면 인당 2유로라는 말에, 화장실을 무료로 쓰고 비도 피할 겸 차라리 카페 음료와 자리도 이용하기로 했다. 3유로짜리 엄마의 에스프레소와 4유로짜리 내 레모네이드로 7유로어치 음료를 마시고, 엄마와 나 각각 2번씩 하여 8유로어치로 화장실을 이용했다. 그렇게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1유로를 벌고 나왔다. 창가 좌석에 앉아 아카시아 꽃잎을 먹는 나무 위의 비둘기를 보았다. 비둘기는 왠지 지하철로 같은 더러운 곳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파리는 비둘기도 우아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몽마르뜨 / 몽마르뜨 위에서 내려다본 파리 시내 / 화장실도 이용하고 비도 피했던 카페


비가 그치고 라파예뜨 백화점까지 살짝 들렀다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밤버스를 타느라 못 씻었던 게 불편하여 씻고, 속옷 빨래도 했다. 저녁엔 나의 파리지앵 친구인 Gauthier와 약속이 있어 에너지를 충전했다. (사실 대부분의 도시가 친구 기반으로 선택된 것이다.) 곧이어 Gauthier와 이야기만 많이 들었던 그의 여자친구 종린이가 우리 호텔로 왔다. 종린은 생각보다 낯을 가렸고 불어는 잘하는데 영어는 잘 못했다. Gauthier는 자기 여자친구가 나와 영어 연습을 하도록 독려했다. 그들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첫날 저녁을 대접해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엄마는 호텔로 모셔다 드리고 우리는 2차로 바에 갔다. 불어로 키스의 뜻을 가진 Bisou라는 이름의 바였다. 칵테일을 이름 보고 고를 수가 없고 웨이터가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답하면 그것을 기반으로 칵테일을 제조해 준다. 랜덤으로 나오는 칵테일 잔들도 범상치 않다. 그러고는 조금 이따 각자 받은 칵테일이 입에 맞는지 질문을 하는데, 사실 내가 받은 칵테일은 내 입에 안 맞았고 (감기약 부루펜 맛이었다…) 선의의 거짓말을 못해 그만 다시 만들어주시도록 하고 말았다. 괜찮다고 했는데 웨이터가 자신이 안 괜찮다고 했다. 반짝반짝한 칵테일로 다시 받았고 다행히 다시 받은 것은 괜찮았다. 그렇게 파리에서의 첫째 날을 잘 마무리했다.


이렇게 글을 쓰니 파리가 몹시 그립다. 다른 도시들에 대해 쓸 때보다 훨씬 더. 역시 파리는 파리인 걸까.


파리지앵 친구에게 대접받은 저녁식사


Bisou 바 외부, 내부 그리고 우리
범상치 않은 칵테일 잔들과 부루펜 맛이 났던 첫 번째 칵테일 / 다시 받은 반짝반짝 칵테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