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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어디로

조급함에도 여유가 생겼다.

by RIZ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는 어떤 여성에게 노홍철이 대답했다.

'그 정도를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서 다 알아야 한다'

주변에서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저 일에 미쳐있구나라고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미쳐본 적이 있다.

고2부터 클래식에 빠져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

클래식음악이 너무 좋았고, 그 수많은 악기를 통솔하여

하나의 멋진 음악으로 만드는 지휘자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나는 나의 속을 잘 내비치는 스타일이 아닌데 친구들에게도 말하고 다녔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순수하고 솔직한 고등학생 때라 그런가?


무튼, 고3이 되고 진로와 대학을 진짜로 결정해야 했을 시절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당장 음악 관련으로 무언갈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음악과 관련 없는 대학과 학과를 정해야 했다.

그 순간 정말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계속 남들과 똑같이 대학을 가고, 회사를 가고, 결혼을 하며 살 것만 같았다.

반항심에 그 뒤로 난 공부를 아예 하지도 않았다.

학교에선 이어폰을 끼고 클래식음악을 듣거나 도서관에 몰래 숨어 책을 읽었다.

점심도 굶고, 땡땡이치고 야자시간을 빼기도 했다.

공연이 있으면 무조건 보러 가고,

유럽에 유명한 한국 지휘자가 내한을 오자 매니저에게 연락해 찾아가기도 했다.

어떤 교수님 집도 가서 절대음감 테스트도 했다.

그냥 말 그대로 미쳐있었다.

하루 종일 들어도 음악은 질리지 않았고 매번 같은 음악을 들어도 감동해 눈물이 났다.

친구들이 단체로 말릴 정도로, 아빠가 학교에 찾아올 정도로,

나의 주변 사람들은 다 나의 미래와 현재 상황을 걱정했지만

하지만 정작 나는 정말 행복했었다.

3천 원짜리 플라스틱 지휘봉 하나 사고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내가 아직도 선명하다.



10년이 넘은 지금

나는 내가 살기 싫었던 그대로

성적에 맞는 대학을 가고 취직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자연스럽게 꺼지듯 사라졌다.




지금의 삶을 후회하냐고?

전혀 아니다.

내가 비난했던 남들과 같은 삶은 사실 굉장히 갖기 힘든 삶이었다.

남들과 같이 대학 가기, 취직하기, 결혼하기, 엄마가 되기

어느 하나 쉬운 적이 없었기에 지루하거나 평범할 수가 없었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 만든 값진 삶이었다.


하지만 노홍철의 말을 들으면서 내가 놓친 한 가지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열정'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는 꾸준하지만

어떤 일을 해도 내가 음악을 사랑하던 시절만큼의 열정은 나오지 않는다.

더욱이 난 내가 얼마나 열정적이었고 음악을 사랑했는지 경험을 했기에

그 정도의 열정이 나오지 않음에 스스로 실망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남은 인생 열정을 불태우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 무언가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 난제이다.


다만 다행인 것은 20대와 달리 별로 조급하지 않다.

20대에는 빨리 길을 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빨리 결정하고 나아가야 뒤처지지 않을 것 같았다.


30대가 되어서인지 결혼을 해서인지 엄마가 되어서인지 나름의 경험의 노하우가 쌓여서인지

조급함에도 여유라는 게 생겼다.


그래서 관심이 가면 천천히 알아가고 배우고

흥미가 떨어지면 아 난 이걸 사랑하지 않구나! 하고 내려놓고

다시 다른 흥미를 찾는다.



앞으로 한 30년은 더 살지 않을까?

그렇게 살다가 하나는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못 찾아도 세상에서 제일 많은 취미 할 동을 한 여자로 남을 수도 있겠다.


다시 전속력으로 달릴 그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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