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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Jun 07. 2022

살림을 살리는 바느질

세탁과 건조를 마친 외할머니의 광목은 빛깔이 희어져서 더 아름다워졌다. 얼룩은 희미하게 남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제거되었고, 풀기는 사라졌다.  기분 좋은 우윳빛의 탄탄하면서도 부드럽고 두터우면서도 투명감이 없지 않은 멋진 원단이 당장 사용하라고 눈앞에서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 다음의 수순은 애써 머리를 짜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더 희어지고 부드러워진 다 마른 광목을 보자 곧바로 예전부터 필요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거실 창문을 반쯤만 가릴 커튼. 아침 나절의 눈부신 햇살과 앞집의 시선을 가리기 위한 필수품이다. 그 다음은 욕실 커튼. 욕실에 습기 차는 것이 싫어서 늘 욕실 문을 열어놓고 지내는 우리 집에서 변기가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가려줄 요긴한 품목이다. 


먼저, 이어붙여진 두 폭을 뜯어내어 실밥을 제거하고 다림질을 했다. 올 튐으로 실 뭉침이 심한 부분들은 쪽가위로 정리했다. 창문 커튼은 90cm 폭을 그대로 모두 이용하기 위해 길이만 잘라내어 작업하고, 양쪽 샐비지는 접어 박지 않고 그대로 썼다. 길이를 자를 때에는 가위를 대지 않고 쪽가위로 약간 따준 다음 잡아당겨 찢었다. 이렇게 하면 간편하게 올 방향을 그대로 살려 자를 수 있다. 


조직의 치밀함 때문에 바늘 들어가는 것이 힘겨웠다. 거의 요즘의 고밀도 원단 조직감. 요즘 광목은 이렇게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지 않다. 바늘을 14호, 16호, 청바지용 16호로 바꿔가며, 둔탁하게 진동하며 뚝뚝거리는 가정용 재봉틀을 달래어 재봉을 했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들은 창문 커튼, 욕실 커튼, 발매트 2장, 가방, 그리고 커다란 수건. 수건은 손 하나 안 대고 90x90 cm 조각을 그대로 쓰기로 했다. 큼지막해서 샤워 후의 수건으로 제격이다.


거실 창문 가리개 (2022. 6.)
욕실 커튼과 발매트 (2022. 6.)
광목 수건과 광목 가방 (2022. 6.)


패브릭 소품 몇 가지를 새로 놓았을 뿐인데 집안 분위기가 대번에 차분하고 멋스럽게 정리되었다. 처음으로 창문 커튼과 함께 한 날 저녁, 새롭고 신선한 기분이 되며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수건과 발매트는 놀라운 흡수력을 자랑하며 기분 좋은 텍스처로 피부를 즐겁게 해주었다. 홑겹으로 만든 숄더백은 완성 후 전사지를 붙일 계획이었으나, 완성된 가방의 자태가 그 자체로 완벽해서 결국 전사지를 붙이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오래 전에 외할머니로부터 엄마에게로 전해진 옛날 광목 약 6야드 분량을, 약간의 자투리를 제외하고 남김 없이 다 썼다. 단 삼일 만에 말이다.


팬데믹은 나를 집안에 가두었지만 나는 집안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다. 언제나 벗어나고 싶었던 가사노동 속에서 숨겨진 즐거움을 발견하자 더 이상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오랜 생각과 몸의 습관이 대번에 고쳐지는 것은 아니어서, 좋아하지 않는 집안일을 갑자기 부지런히 즐겁게 할 수는 없었다. 22년 여름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진행하다보니 자연히 집안일을 내버려두게 되었고, ⟪느린손 프로젝트⟫ 또한 공백기를 맞게 되었다. 외할머니의 모시옷들은 세탁하지 못한 채 보관만 하고 있었고, 행주를 만들기 위해 2년 전에 구입한 무형광 광목 거즈를 세탁해서 다림질까지 해놓았지만 행주를 만드는 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다 해도 점점 심해지는 집안 꼴을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는 없었다. 집안의 다른 곳들은 조금 내버려둔다 하더라도 부엌 위생까지 나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가사노동죽어도하기싫어병’은 중증으로 치달아서, 이 병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9월 중순쯤, 나는 밀린 설거지와 부엌 정리를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는 위기감에 몰려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엌 살림법을 조금 바꿔보고 싶었다. 그 때까지 나는 공짜로 받은 노랑, 분홍 부직포 행주를 대충 몇 달 쓰다가 버렸고, 미뤄둔 설거지는 더 많은 세제를 쓰게 했다. 위생에도 환경에도 좋지 않은 살림 방법은 효율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외할머니의 광목으로 만든 수건과 발매트를 사용할 때마다 방식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깔끔하고 정갈하게, 그리고 지구를 생각하는 살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은 그 오래된 재래식 광목이 나에게 들려주는 목소리와도 같았다. 


"봐, 이렇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존재들이 가득한 곳이 이곳이야. 해치지 마. 함부로 대하지 마. 살리는 살림을 해 봐."


소창 행주와 천연 수세미가 답인 듯했지만 자주 행주를 삶는 부지런함과 깔끔함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생각 끝에 살림 고수들이 모여 있는, 늘 가던 바느질 커뮤니티에 질문을 올려 조언을 구했다. 살림의 명인들은 매번 행주를 삶는 완벽한 방법을 실천하기보다는, 1주일에 한 번 모아뒀다 삶기, 전자레인지에 돌리기, 삶는 미니 세탁기 이용하기, 하룻밤 과탄산 물에 담갔다가 다음 날 세탁기로 세탁하기, 가끔 날 잡아 삶기 등으로 타협하고 있었다. 


그 답글들에 용기를 얻은 나는 행동을 개시했다. 


강화소창이 좋다지만 잘 알지 못하던 시절에 이미 2마의 광목 거즈를 구입해서 준비해놓았으므로 그것을 쓰기로 했다. 작은 크기를 선호하는 내 취향에 맞게 29*29 cm 로 사이즈를 정하고 원단 폭에 맞춰 계산해서 재단하고 3겹으로 박아 12장을 만들었다. 선세탁을 했지만 풀기가 완전히 빠지지 않았으므로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스테인레스 볼에 과탄산소다를 넣고 세 번 삶은 다음 세탁기로 온수 헹굼을 세 차례 진행했다. 다 마른 다음 테스트해보니 비로소 물기를 쫙 흡수하는 것이, 정련이 제대로 된 듯했다.


광목 거즈로 만든 행주들(2022. 9.) 결국은 삶아서 정련했다.


가지고 있는 올 굵은 리넨 자투리로 헹굼 수세미를 만들고, 온라인으로 천연 수세미 제품들을 열심히 찾아 비교해서 마음에 드는 압축 수세미를 구입했다. 


삼베 행주들과 리넨 자투리로 만든 헹굼용 행주 (2022. 9.)


때마침 공동구매 기회가 있어 국내에서 재래식으로 직조된 삼베 11마를 구입하고, 시험 삼아 두 개의 행주를 만들었다. 단촐한 부엌 살림에 행주 수가 너무 많다 생각되어 광목 거즈로 만든 것들은 세안용 수건으로 쓰기로 하고, 남은 삼베로는 행주를 만들어 때때로 선물하기로 했다.


살림 바느질이 손에 잡히니 자꾸만 필요한 것들이 떠올라, 자투리를 모아 옷방 창문 가리개를 만들고, 1마 반쯤 가지고 있었던 워싱 광목을 전부 사용해서 커다란 타월을 2장 만들었다. 광목 타월을 한번 써보니까 생각보다 훨씬 느낌이 좋아서 더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장은 한 겹으로 접어박기하고, 한 장은 두 겹으로 만들어 대각선 박음질을 해줬다. 그 외에도 발매트를 하나 더 만들고, 발수건으로 쓰려고 오래된 수건들에 고리를 달았다. 


다시 만든 광목 수건, 그리고 세안용 수건으로 용도 변경된 행주 (2022. 9.)


옷방 창문 가리개는 갑자기 어느날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광목과 거즈 들을 꺼내놓다 보니 손에 잡히는대로 흰색 원단들을 내놓았었는데,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장 필요한 것이 생각났다. 얼마 전에 창문 옆 옷걸이에 걸린 리넨 재킷의 어깨 뒤쪽이 햇빛으로 인해 변색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창문 가리개를 만들어 달면 해결될 일인데 마땅한 크기의 흰색 원단이 없었다. 꺼내놓았던 흰색 자투리 천 모음이 바로 손 닿는 곳에 있었다. 제일 큰 조각을 펼쳐보니 얼추 창 넓이에 딱 맞았다. 조각들을 대충 맞춰보니, 패치워크를 조금만 해주면 가리개 한 장이 나오겠다 싶었다. 되는대로 맞춰가며 오버록과 재봉틀로 이리저리 박아서 대충 완성했다. 시계를 보니 2시간쯤이 지나 있었다.


옷방 창문을 가리기 위한 가리개 (2022. 9.) 필요성 레벨 높음. 긴급성 레벨 높음.


완성된 크기는 대략 80*80 정도. 


완성품의 크기를 ‘대략’이라 한 것은 정말로, 다 만든 다음 대충 재어봤기 때문이다. 정확한 크기는 모른다. 처음부터 정확함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만들었다. 대충 맞춰가며 만들었기 때문에 삐뚜름한 부분도 있고 실수한 부분도 있는, 이런 패치워크가 좋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계산해 치수를 다 정해놓고 재단해서 만드는 패치워크보다, 나는 이런 무계획적인, 가난한 패치워크를 좋아한다. 아마도 초기의 퀼터들이 삶의 필요에서 해냈을 법한 방식이다. 계산도, 많은 고민도 없는, 쉽고 편안하고 빠른 방식. 어수룩하지만 자연스러운 맛이 있어서 오히려 멋지게 보인다. 


재래식 원단들이 마음에 들어 강화소창과 무명도 가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이미 만든 것들로 충분해서 더 이상의 원단은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기, 무작정 욕망을 따라가며 살림을 늘리지 않기. 이것이 바로 살림을 살리는 제1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가사노동죽어도하기싫어병’은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습관을 고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 터. 재래식으로 직조된 친환경 원단들의 도움으로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 글은 22년 6월에 발행한 글을 22년 10월에 수정하고 덧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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