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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질씨드 Oct 29. 2022

내가 누구인지 내 옷에게 물어봐

많은 사람들의 옷장 속에서 트레이닝 팬츠와 스웨트 셔츠가 으뜸 일꾼이 된 팬데믹 기간 동안 나는 쏠쏠하게 티셔츠를 만들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옷 만들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여러 계획들이 자기들끼리 문어발 경영을 시작할 조짐을 보이더니, 그대로 뒀다가는 부실기업 꼴이 날 판이었다. 수시로 점검해서 쳐낼 것은 쳐내고, 계속할 것을 위해서는 연구와 개발이 필요했다.


가장 많이 만든 아이템은 바지였다. 기성복 중에서 가장 만족감이 떨어졌던 것이 바지였기 때문이다. 기성복 바지들은 열이면 열 내 체형에 맞지 않았다. 길이 수선 정도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바지를 되도록 사지 않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대충 타협해서 몇 벌로 돌려 입고 있었다. 처음 바지를 만들었을 때, 나는 곧 직접 만들어 입도록 고안된 패턴들이 기성품과는 달리 상당히 현실적인 몸매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길이는 내 몸에 맞춰 조금만 조절하면 되었고, 대체로 밑위가 길고 허리가 넉넉해서, 결코 늘씬하지 않은 체형을 가진 내가 입어도 무리가 가지 않았다. 몸은 편하고 핏은 좋은, 기대 이상의 결과에 만족한 나는 내 체형에 맞는 패턴을 선택해서, 입고 싶었던 거의 모든 스타일의 바지를 시도해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만든 바지들. 아낌없이 패턴을 공유해주신 쏘잉핏님의 덕을 단단히 봤다.


내 몸에 잘 맞고 마음에 드는 바지를 거의 갖고 있지 못했기에, 만들고 또 만들어도 충분치 않았다. 원피스나 스커트보다는 바지 차림을 즐기는 나에게 바지는 생필품이었고, 그 생필품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한히 기뻤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바지 차림을 즐긴다 해도 로망은 로망이었다. 바지는 현실이었지만 현실만으로 살아간다면 너무 팍팍할 것이므로, 나는 때때로 한껏 강렬한 판타지를 담은 옷을 만들었다. 어느날 갑자기 떠오른 아이디어로 체리색 아일렛 자수 면 원피스를 만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체리색 아일렛 자수 면 원피스(2020. 7.) 그림은 윤혜린 작가의 솜씨.


그 때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이 새빨간 아일렛 자수 코튼을 구입한 건 2017년 12월이었어요. 그 당시 딱히 유행이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제가 드나들던 원단 카페에선 '도봉산 장인'의 작업이라는 믿거나 말거나 조크와 함께 쏠쏠히 아일렛 자수 원단이 올라왔었습니다. 옷 만드는 이라면 누구라도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원단 맞죠? 저도 몇 개 쟁였습니다. 

그 후 시간은 잘도 흘러갔지만 기본 아이템에 필요한 봉제법을 익히느라 로맨틱 판타지를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적어도 이번 초여름까지는요. 그러니까, D님의 원피스들을 비롯한 환상적으로 예쁜 몇몇 원피스를 보기 전까지는요.

거기에 더해 주변의 쏘잉러들은 폭이 2미터가 넘는 러블리 끝판왕 드레스를 만드느라 여념이 없는데 저만 혼자 고밀도 원단과 싸우는 둥 마는 둥 일에 치여 옷 만들기는 한쪽으로 치워둔 상태로 한 달쯤을 보내고 나니, 어떻게든 보상을 받아야겠더라고요.

어느날 갑자기 원단을 꺼내어 어느 날 갑자기 결정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작업에 들어갔지요.

구깃구깃했던 원단을 다림질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엄청나게 기분이 좋아지더니, 작업을 하면 할 수록 달달한 엔돌핀이 뇌 속을 채우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2020. 7.)


마음에 드는 패턴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어떤 원단으로 만들까 궁리하는 기쁨, 의외의 조합을 떠올렸을 때 이거다! 하는 기쁨, 작업의 즐거움, 완성 후 입어봤을 때의 기쁨, 내가 만든 옷을 입고 나갈 때의 기쁨. 옷 만들기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었지만 의외로 원피스가 주는 기쁨은 컸다. 내가 만든 원피스를 입으면서 비로소 여성스러움과 편안함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몸의 편안함과 마음의 편안함은 한 쌍이라는 것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또 하나의 큰 프로젝트는 아우터였다. 재킷과 코트들을 띄엄띄엄 만들었다. 아우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이 많았다. 안감 넣기, 바이어스 테이프 바인딩으로 속 처리하기, 테일러 칼라 봉제를 익히고 나니 이제 패턴을 수정해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재킷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옷 만들기의 끝판왕이라는 정장 재킷 테일러링을 익히다보니 슬슬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예전엔 기성복 재킷들을 봐도 큰 감흥이 없었는데, 보는 눈이 생기자 디테일을 분별해서 보게 되었고, 체형의 장점을 살려주거나 단점을 커버하면서 나를 돋보이게 하는 묘미도 좀 알 것 같았다.


아우터는 손이 많이 가서 많이 만들지는 못했지만 필요한 만큼은 갖추게 되었다.


남성 재킷 패턴에서 출발해 1900년대 초 스타일의 워크 재킷 디자인으로 변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남성 재킷 패턴에서 출발해 1900년대 초 스타일의 워크 재킷 디자인으로 변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짧은 라펠, 짧은 듯한 기장, 둥근 앞 중심 밑단, 흰색 면 안감이라는 포인트들을 살릴 예정이었다. 포인트들의 매력 때문인지 패턴 단계에서부터 벌써부터 귀여운 느낌이 들어서 흥분되었지만, 곧 멈춤 상태가 되고 말았다.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팬데믹 기간 동안 나의 강의들은 모두 온라인으로 바뀌어서 사실상 외출할 일이 없었고, 재킷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대면 강의를 시작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재킷을 만들었다. 두툼한 멜톤 원단을 선택하고 어깨 패드와 슬리브 헤드를 넣어 어깨에 힘을 주고, 패딩 안감으로 보온성을 준 매니쉬 재킷. 각 잡힌 당당함이 극대화된 재킷이어서, 초겨울과 초봄에 강의용으로 입으면 최고의 아우라를 뿜어낼 것이라 기대하며 신이 났지만, 22년 1학기에도 내 강의는 여전히 온라인 강의였다.



두툼한 블랙 멜톤으로 만든 매니쉬 재킷 (2022. 1.)


22년 여름 동안 나는 거의 옷을 만들지 못했다. 강사법에 의해 3년 계약이 끝났으므로, 여름 동안 많은 대학에 지원서를 내느라 바느질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할 일이 많기도 했고, 길게 지속된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옷의 필요성이 실감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고, 바느질에 대한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바느질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만족감이 느껴졌다. 


9월이 거의 가까워졌을 때 오랜만에 재봉틀 앞에 앉았다. 2월에 머플러를 만들고 남은 베이지색 거즈 리넨으로 셔츠를 만들고 싶었다. 머플러를 만들고 남은 원단이다보니 길고 좁아서 옷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패턴을 대어 봐도 분량이 모자라 접어뒀던 작업이었다. 바느질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만든 뒤겨돌셧 셔츠를 보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절개가 많이 들어간 패턴! 대어 보니 놀랍게도 분량이 나왔다. 깨끼 저고리를 만드는 기분을 한껏 느끼며 통솔로 솔기를 처리해 셔츠를 만들었다. 겹쳐 입을 용도여서 단추도 달지 않았다. 투명감이 있는 여름 셔츠. 속이 은은히 비치는 것이 잠자리 날개 같았다.


온라인 특강이 있어 이 옷을 입었다. 정신 없이 특강을 준비하고 촬영이 끝나자, 이제 곧바로 새 학기에 시작할 새 강의의 강의안을 만들어야 했다. 매일 하루종일 책상 앞에 앉아 꼬박 열 시간쯤 노동을 하다가, 바람을 쐬러 옥상에 올라갔다.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로 바뀌고 있었다. 바닥에 반짝이는 작은 물체가 보여서 쪼그리고 앉아 자세히 보니 어디선가 날려온 잠자리의 한쪽 날개였다. 오랜만에 새 옷을 만들며 잠자리 날개 같다고 생각했는데, 새롭게 돌아오는 계절에게서 진짜 잠자리 날개를 선물받은 것이다.


잠자리 날개 같다고 생각하며 옷을 만들었는데, 옥상에 올라갔다가 진짜 잠자리 날개를 선물 받았다.


새 학기의 강의들은 비로소 2년 반만에 대면 강의로 재개되었다. 오랜만에 먼 거리의 시내 운전을 하려니 피곤하게 느껴져서, 지하철과 버스를 두세 번 갈아타가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여러 번 갈아타야 하는데도, 놀랍게도 차량으로 갈 때보다 적은 시간이 들었다. 나는 일찍 출발해서, 가는 내내 스마트폰으로 강의안을 읽었다. 시내 운전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니 가볍기 그지 없었다. 


이번 학기,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수업 태도가 좋다. 그 동안 대면 강의와 학교 생활에 목말랐음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초롱초롱한 눈을 맞추며 강의하게 되어 무척이나 행복하다. 그 동안 내가 만들어놓았던 옷들은 그 행복감을 떠받쳐주는 한 요소이다. 그 옷들은 내가 나를 온 몸으로 표현하며 시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나는 그 옷들을 입고 가장 나은 나, 가장 나다운 내가 된 기분으로 학생들과 소통한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서 든든히 지원받고 있는 느낌으로.


드디어 이번 가을에 잘 입고 있는 셔츠(202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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