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이라면?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면, 당신께서는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만약 당신께서 마음이 튼튼하고 한 번도 우울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세상에는 매일 재미있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고 당장에 핸드폰만 켜도 웃긴 이야기, 흥미로운 소설, 어떻게 완결 날지 궁금한 웹툰과 분마다 몇 개씩 쏟아지는 무한한 동영상들을 접할 수 있는 이곳에서 왜 우울한지, 왜 죽음을 생각하는지 공감되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그런 당신일수록 이 글을 읽어보셔야 합니다. 당신께 무한한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도 적어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면 말입니다.
보건·의료계 공동행동에 따르면, 2019년에만 우울증 등 정신질환으로 진료받은 환자는 170만 명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약 판매 순위 10위 안에 우울증 약이 들어가는 수준입니다. 100명 가운데 40명은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 10명이 있다고 하면, 그중에서 우울증을 겪고 있을 당신의 친구는 4명 정도 될 것입니다.
다포 세대라고 불리는 2030 세대에서 우울증은 더 많이 발견됩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나라, 좌절과 상실의 시대에 사는 당신이 우울증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사랑하는 사람에는 당신, 자신 또한 포함됩니다.
필자인 나는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불면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섭식장애, 무기력증에 수많은 자해와 자살 시도 경력까지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울증으로 인한 생활 패턴 변화로 갖은 질병들을 달고 사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불린다. 오늘 하루도 버티기 힘들어 죽음을 생각하는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세 가지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 당신께서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막아주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을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위로받고 치료받길 바라서다.
이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자 많은 사람들이 겪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모르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당신께서 보잘것없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주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이유는 남들과 비슷하다. 부모님과의 불통, 형제와 친구들과의 불화 등등. 유치원을 다닐 때 나는 소위 말하는 골목대장이었다. 물론 아파트에 살아서 골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유치원에서도 아파트 단지 안에서도 친구들을 사귀는 게 가장 쉬운 일이었고 내 놀이를 제안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아이들은 메이커 옷을 입고 메이커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무리가 달라졌다. 예쁘고 잘생기고 옷 잘 입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무리. 나는 얼굴에 자신이 있지도 않았고 옷 입는 센스도 전혀 없었다. 엄마와 시장에서 사는 신발에 불만이 없던 내가, 잘 나가는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 메이커 옷을 입고 메이커 신발을 신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못생겼다. 어릴 때는 자신 있던 친구와 친해지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왕따라는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친구를 왕따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다가 내가 왕따를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왕따가 되는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다. 단순히 주동자의 눈에 자신에게 잘하지 않아서였다. 유치원을 다닐 때는 내가 대장이었는데, 나는 더 이상 대장이 아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졌다. 그렇게 남들과 별반 다름없는 이유로 내 우울증은 시작되었다. 처음 자해를 시작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때의 자해는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의 미미한 상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자해는 당시 내 의지로 멈추기 힘들었다. 손목에서 시작되어 손등과 팔로 이어지던 자해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나는 허벅지 위쪽에 자해하기 시작했다. 의학적 지식이 없던 내가 봐도 꿰매야 할 정도의 자해를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그리고 그 위로 새 살이 돋으면 다시 자해를 시작했다.
조금은 잔인하고 징그러울 수 있는 얘기겠지만, 한 번은 돋아나 온 새 살이 통째로 벗겨질 정도였다. 지금도 여전히 자해흔은 남아있다. 자해는 내가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엄마, 아빠가 항상 내게 마법을 걸었기 때문이다. “대학만 가면 뭐든 할 수 있어,”라는 마법. 나는 그걸 믿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원하고 엄마, 아빠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대학에 합격했다. 단 한 장만 쓴 수시 원서로 말이다. 그렇게 엄마, 아빠의 마법이 이뤄졌다면, 나는 거기까지가 내 우울증의 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법은 퍽 이뤄지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시험 점수로 혼나야 했다면, 대학 시절에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의 학점에도 혼나야 했다.
물론, 엄마, 아빠와의 인연을 끊어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문제는 내 집이 국가장학금 소득 분위에서 10분위였다. 그 말은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학교 장학금 외에는 국가 장학금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학자금 대출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내가 부모님의 도움 없이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는 학기 중이든, 방학 중이든 아르바이트만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애석하게도 내 전공은 학기 중에 무수한 공부량이 있어야 했다. 나는 그래서 아빠의 금전적 지원과 협박 아래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학기 중에는 자취를 했기 때문에 무수한 공부량에 치여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마음껏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고 친구 집에서 외박도 하고 밤새 게임도 할 수 있었다. 물론, 학생일 때는 할 수 없었던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그때만큼은 편하게 웃고 떠들었다. 가끔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러나, 종강을 하고 짐을 챙겨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오면, 강압과 억압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나의 우울증도 다시 시작되었다. 담배를 피울 수도 없었고 귀가를 늦게 해도 안 됐다. 외박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늦게까지 게임을 하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의 잔소리가 시작되었다. 술을 마시고 조금의 늘어짐이라도 보이면, 술주정 부리지 말고 씻고 들어가서 자라는 차가운 말이 돌아왔다. 담배 냄새를 풍기면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담배 피우다 걸리기만 해 보라는 협박이 이어졌다.
내게 있어서 마법은 없었다. 학생일 때는 학생이라서 안 되던 것들이, 성인일 때는 성인이라서 안 되는 게 되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완벽해야 하는 인형이었다. 그렇게 완벽해야 하는 인형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완벽하게 무너졌다.
내가 처음 신경정신과를 갔을 때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용돈을 모아 병원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내게 돌아온 것은 절망이었다. 미성년자라서 보호자의 동의가 없다면, 약물을 처방해줄 수 없다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다. 나는 말없이 다음에 부모님과 같이 온다는 거짓말을 하고 병원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미련하게 왜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냐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완벽해야 하는 인형이었고 나보다 2살 나이가 많은 형제는 문제가 많았다. 나의 형제는 엄마, 아빠가 바라는 완벽한 인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엄마, 아빠의 신경은 항상 나의 형제에게 향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차마 엄마,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덜 아픈 손가락이자 말 잘 듣고 알아서 잘하는 자식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2학년, 21살이 되어서 보호자의 동의 없이 드디어 신경정신과에 스스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8살이 된 지금까지 신경정신과에 다니고 있다. 약이 없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에 서 있다.
지금 먹는 아침 약은 이미 최대치에 이르렀다. 밤에 먹는 온갖 신경 안정제와 불면증 약의 양은 다른 의사 선생님이 보면 놀랄 정도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내 상황이 악화되어 갈수록 낮에는 늘 불안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밤에는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자연스레 스르륵 잠이 들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 밤 지는 해도, 매일 아침 뜨는 해도 모두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유독 겨울을 잘 탄다. 겨울은 나에게 있어 행복하기보다는 끔찍한 계절에 가깝다. 나에게 끔찍한 일들이 제일 많이 일어났던 계절이 아무래도 겨울인 거 같다. 나는 3년에서 4년 사이로 인생에 큰 방황기를 겪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시작된 중2병이 고2병으로 되었고 대2병도 생겼다. 그리고 2019년 겨울에는 약물 의존증을 넘어 약물 중독이 시작되었다. 한 달 치씩 받아오는 약을 하룻밤 사이에 다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이유는 죽고 싶어서였다. 날마다 그렇게 죽고 싶어서 살았다.
한 줌이 넘치는 약들을 손에서 입으로 털어 넣고 오늘은 죽겠지, 내일은 죽을 수 있겠지, 생각하며 살았다. 덕분에 의식 없이 응급실에 실려가길 반복했다. 집에 있는 모든 약들을 집어삼키기에 이르렀고 간 손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중환자실 대신 일반 병실로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보호자가 항시 같이 있겠다는 조건이 붙어서였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그렇게 힘들어하던 나를 보던 엄마의 한심하고 지겹다는 듯한 눈초리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계속 토하기만 하고 있는 나를 두고 밥을 먹으러 자리를 비운 엄마, 아빠의 뒷모습이다. 어디 가느냐고 묻는 나에게 “너 때문에 밥까지 굶어야겠느냐,”라고 말하던 엄마의 말이 비수로 꽂혔다. 완벽하지 않은 인형에게 자비는 없었다.
그리고 엄마, 아빠는 나를 강제 입원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의 애원으로 강제 입원은 무산되었고 강제로 우울증과 불면증 약을 모두 끊어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죽고 싶지만, 버림받을까 봐 무서워 참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집에서 사고가 일어났고 나는 다시 신경정신과를 다니게 되었다. 2020년도와 2021년도 겨울은 그래도 무난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2022년도 겨울은 아직 다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도 혹독하다.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도와달라고 말했고 그 말에 엄마와 아빠는 당장 차를 끌고 와 나를 본가로 데려갔다. 본가에서의 생활은 순탄할 것만 같았지만, 나는 너무도 죽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칼을 꺼내 들었다.
나는 칼을 가지고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당연히 두 번 모두 실패했고 내 왼쪽 손목에는 실밥이 묶여있고 밴드가 붙여져 있고 붕대가 감겨있다. 나는 자살 실패자일까, 자살 생존자일까. 여전히 의문이 생긴다.
나의 이야기가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100명 중 40명은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경험함 적이 있다는 통계가 있다. 지금도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는 벼랑 끝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은 꼭 우울증에 대해서 알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