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폭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한 뼘짜리 추억보다 한 뼘짜리 상처가 더 오래간다.

by 쉐리


지금 우리 사회에는 아주 다양한 형태의 폭력이 존재합니다. 언어폭력, 감정 폭력(감정 쓰레기통), 아동 폭력,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학교 폭력, 성폭력, 묻지 마 폭력(인과 관계없이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 갑질 폭력, 인종 폭력(인종 차별), 동물 폭력(동물 학대) 등 정말 많은 폭력들이 우리 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연일 뉴스에 오르락내리락하길 반복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당신께서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앞서 말한 두 가지의 경험 모두 당신께서 겪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분명 어떤 경험이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애석하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말입니다.

친구와 다투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폭력을 당했다면 당신보다 우위의 사람에게, 그리고 폭력을 행사했다면 당신보다 열위의 사람에게일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께서는 왜 폭력을 당하여야만 했고, 왜 폭력을 행사하여야만 했을까요? 아마도 화가 났기 때문에, 그리고 우위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화, 즉,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이유로 분노를 느끼고 화를 내면서 살아갑니다. 이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분노를 마음속에 쌓아놓고 살아가기보단 적절한 방법으로 해소하며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을 평온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 분노를 표현함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방법이 바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고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해소하지 못했을 때, 바로 강력하고 극단적인 방법인 폭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분노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은 15초 정도의 지속시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순간에 분노를 느꼈다고 해도 20초만 참으면, 우리는 다시금 침착하고 적절한 방법으로 분노를 해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15초를 참지 못하는 순간,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가장 강력한 방법인 폭력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분노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이 작용하는 15초라는 시간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경험이 누적될수록 사람은 더욱 쉽게, 더욱 강력하게 폭력을 분노 표출의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적절한 방법과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 분노를 진정할 방법이 있음에도 자신에게 점점 쉬워지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을 분노라는 이유로 정당화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유형의 피해자가 발생합니다. 첫 번째 유형은 당연히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이며, 두 번째 유형은 폭력을 당하면서 이 방법을 학습하는 피해자입니다. 전자가 학습된 무기력에 빠질 때, 후자는 학습된 폭력으로 새로운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폭력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한 번 시도했을 때, 이 방법으로 문제가 잘 해결된 것 같다고 느낀다면, 다시 폭력을 분노 표현의 방법으로 선택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전파력이 빠르다는 점입니다. 폭력을 당하던 피해자를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만들기 쉽다는 것. 폭력을 당했던 당신께서 폭력을 행사하는 버릇을 갖게 할지도 모르며, 어느 순간 당신께서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무서운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우위를 지키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어떨까요? 폭력을 써야만 지킬 수 있는 우위와 권위라면, 애초에 없는 게 마땅한 것 아닐까요? 우위를 지키기 위해 쓰는 폭력 역시 글의 시작에서 말한 다양한 폭력의 종류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폭력에서도 약자가 강자를 향한 폭력은 없습니다. 대체로 강자가 약자를 향해 행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를 예시로 든다면,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입니다. 스토킹 방지법은 몇십 년째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다 사회는 수많은 피해자를 잃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데이트 폭력 또한 그저 연인 사이의 사소한 다툼 정도로 생각하기 부지기수였지만, 지금은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A씨는 우연한 계기로 B씨를 알게 되고 서로 호감을 느끼고 만남을 지속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인이 되었고 앞으로 평생 꽃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B씨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B씨는 A씨에게 연락이 안 된다고 화를 내기 시작했고 다른 이성과의 연락을 차단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처음에 A씨는 B씨가 가진 질투심 때문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믿음을 보여준다면, B씨가 바뀔 수 있을 거라 다짐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B씨의 집착은 줄어들 생각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격하게 반대하기 시작합니다. A씨는 차분히 B씨를 달래려고 해 보지만, B씨는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에 A씨는 B씨와의 다툼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A씨는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A씨는 B씨에게 이별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B씨는 이별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연락을 해오고 집과 회사까지 찾아오기를 반복합니다. A씨는 B씨를 스토킹으로 신고했고 B씨는 접근금지 명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이야기의 끝은 A씨의 죽음입니다. B씨는 자신의 옛 연인 A씨를 죽인 살인자가 됩니다.

여기서 B씨는 왜 꼭 A씨를 죽여야만 했을까요? 왜 A씨의 사생활을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려 들었을까요? A씨는 B씨와 연인 관계를 맺었지만, B씨는 A씨를 소유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질투에서 벗어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A씨를 대했고 이에 반항하는 A씨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습니다. 자신의 소유물이어야 하는 A씨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소유란, 당연히 A씨와 B씨의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고 수직적이어야 하며 B씨는 A씨의 우위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B씨는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A씨를 향해 폭력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칼을 겨눴고 무고한 생을 거둬갔습니다.


과연 연인 관계에서 우위가 필요했을까 생각해본다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연인 관계를 떠나서 모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수평을 유지해야만 하며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을 자격을 부여받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자유민주주의인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며 당신보다 직위가 높은 사람이 있을 수는 있어도 당신께서 가진 인간성과 존엄성보다 우위에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디에서라도 우리는 평등할 자격이 있으며, 이미 오래전 폐지된 군주제와 신분제를 되풀이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어느 관계에서도 우위에 있을 자격이 없음과 동시에 당신 역시 열위에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나의 삶은 항상 열위에 있었다. 이전의 이야기에서도 말했듯이 가부장적인 아빠와 그에 순응하는 엄마를 둔 나에게 있어서 평등함은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가족 간에는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계급이 존재했다. 나는 그 계급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막내라는 이유로 예쁨 받지만, 막내라는 이유로 하대 받았다.


우리 집에서의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대물림되는 모양새였다. 막내딸이라는 이유로 아빠는 날 직접 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사실 맞을 짓을 하지도 않았고 그 어느 상황이든 어떠한 폭력은 허용되면 안 되는 게 당연한 거지만.) 그러나, 내 형제는 아빠에게 꽤 시달렸다. 애초에 나와 다른 성격으로 굉장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내 형제였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어린 시절의 아빠는 나보다 내 형제에게 굉장히 강압적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내 형제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아빠는 내 형제의 뺨을 때렸다. 그 폭력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치 사진으로 찍어 놓은 것처럼 나는 여전히 기억한다. 엄마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텔레비전은 켜진 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거실 구석에 앉아있었고 아빠와 내 형제는 주방의 엄마와 거실의 나 사이에 있었다.


정말 드라마에서만 보던 클리셰와 같은 장면처럼 듣기 거북한 마찰음이 들렸고 화가 잔뜩 난 아빠, 그리고 내 형제는 고개가 엄마를 향해 돌아간 채 서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의 기억은 멈춰있다. 지금까지도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렇게 아빠가 내 형제를 폭력적으로 대했다면, 내 형제는 나를 폭력적으로 대했다. 가족 내에서 폭력이 대물림 되는 순간들이 늘 발생했다. 아빠는 내 형제를, 내 형제는 나를 향해 말이다. 나는 당연히 그 폭력을 반복할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한 폭력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야 했다.


나의 형제는 늘 나에게 폭력적이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나의 코를 향했고 그 결과 나는 코피를 흘렸다. 둘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내 형제가 나에게 욕설을 내뱉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내 형제에게 맞지 않기 위해 방으로 도망쳐서 방문을 잠그는 데에 성공하면, 내 형제는 내 방문을 발로 찼다. 그래서 실제로 방문이 부서진 적도 있었다.


당연히 나는 이 폭력을 그저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내 형제가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나에게 폭력적인 모습을 보였을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당연히 나의 보호자인 엄마와 아빠가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없었다. 물론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내 형제를 혼냈겠지만, 폭력적인 상황들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변하는 건 없었고 나의 형제는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군대에 가기 전까지 꾸준히 폭력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의 폭력들 속에서 자라났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나를 압박하고 협박하는 아빠와 그런 아빠에게서 나를 방관하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긴 엄마, 아빠에게서 배운 폭력과 가족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던 나의 형제는 당연히 나를 망가뜨려 놓았다. 당연히 제정신으로 자랄 수 없었던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내 모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에게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었냐고 되려 묻곤 한다.


사실 나는 버텨내지 못했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괴물로 자랐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죽지 못해 사는 괴물에 불과하니 말이다. 누구보다 폭력을 혐오하던 내가 성인이 되어서 연인 사이였던 사람들에게 싸울 때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내가 혐오하던 모습이었다. 스스로 화를 감추지 못하는 아빠를 싫어했고 다툼이 생기기만 하면 폭력으로 이기려는 내 형제를 혐오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나에게 가장 친밀한 사람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나는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내가 싫어하는 행동을 한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놀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니, 모두 다 핑계로 내가 가장 아껴야 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던 추악한 짓들을 했다. 내가 평생 갖고 가야 할 나의 죄다. ‘여자’라고 해서 해도 되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들을 자행했다.


그렇기에 나는 괴물로 자랐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당사자가 들으면 변명이라고 말하겠지만, 진심으로 나는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다만, 괴물인 걸 숨기고 선량한 사람인 척 연기하며 다가가서 미안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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