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하루 휴가를 쓴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묵혀두었던 집안일들을 해결한다. 약간의 설거지. 분리수거. 택배상자 정리. 땀이 조금 날 정도로 바지런을 떨고 나선 지난 휴가 때 달뜬 마음에 집어든 홍차를 우린다.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소파에 기대어 몇 장남은 책을 마무리한다. 짧은 감상을 기록하고 목욕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완벽한 휴가의 시작.
부산에는 매끈목욕연구소라는 단체도 있다. 전국유일. 목욕탕을 취재하고 기록하는 잡지도 만든다. 화려한 컨셉으로 치장한 목욕탕들이 아닌, 깨끗한 물과 친절로 승부하는 목욕탕들이 주인공이라 좋았다. 남포동 국제시장 사이에 있는 녹수탕이 오늘의 목적지. 만원을 내면 빳빳한 신권으로 이천 원을 거슬러 준다. 사인물부터 캐비닛, 욕장 타일까지 하얀색으로 컨셉을 맞춰 깔끔한 느낌의 첫인상.
[목욕탕에 진심인 사람들도 있다. 캐릭터에 팝업스토어까지 연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가 몸을 녹인다. 한 여름인데도 풀려나가는 뭔가가 있다. 얼굴 속까지 열기가 올라올 즈음 냉탕으로 자리를 옮긴다. 조심스럽게 발을 담그고 손바닥으로 가슴에 물을 뿌려 심장에 신호를 준다. 초등학교 때 모범생이었던 티가 난다. 사실은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뭐 아무튼. 어느 정도 몸을 찬물에 적응시키고 나서 온몸을 찬물 속에 담근다. 오른손으로 코를 잡고 고개를 숙여 머리까지 전부 물속에 넣는다. 귓속으로 찰랑찰랑 탕 속에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나고, 목뒤까지 시원해진다. 온몸이 차가워진다. 둥둥 떠있고만 싶은데. 아직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 배영이라도 배워야 하나.
꼬맹이 시절 옥상에 다라이를 가져다 놓고 찬 물을 가득 채워 물놀이를 하곤 했었다. 지금은 혼자도 못 들어갈 빨간 다라이에 동생과 둘이서 놀았다. 뭘 하며 놀았는지는 기억도 안 나는데, 무척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볍지 않은 다라이를 옥상에 올리고, 긴 호스를 끌어다 물을 받고, 땡볕에서 우리를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는 즐거웠을까? 모르겠다. 실컷 놀고 나면 그 물에서 때타월로 빡빡 때를 밀어주셨다. 오늘 냉탕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를 듣다 보니 그 기억들이 물 위에 때처럼 둥실 떠올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목욕과 피서를 한 번에 해결했었구나.
바닷물에 빠지는 피서에 비해 냉탕에서의 피서는 장점이 많다. 돈과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얼굴이 타지 않는다. 물이 짜지 않다. 심지어 부산의 목욕탕에는 자동 등밀이기계도 있다. 약간 덜 마른 머리를 털며 나와서 매끈해진 얼굴로 바나나 우유를, 아니 이제는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마신다. 올여름도 이렇게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