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장거리 달리기 훈련을 앞두고, 이틀 전 30K 훈련의 피로와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여독을 풀기 위해 목욕탕에 갔다. 서울이라고 모든 게 고급은 아니어서 좋았던 동네 목욕탕.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근육을 풀어주는데 냉탕이 미지근한 게 조금 아쉽다. 그래도 메가시티 서울에서 이 정도의 한적함이면 그 정도는 양해가능한 수준이라 생각하며 정신승리. 찬 물에서 어푸어푸하고 있는데 세신광고가 유독 많이 보였다.
'핫 때밀이 세신+지압+마사지+샴푸, 32,000원'
'6시 이후에 때밀이도 잘하는 분이 왔습니다. 믿고 맡겨보세요'
20년 전 PPT 장표를 닮은 모양의 광고물들을 보며,
'근래에 보기 힘든 열정을 가진 세신사가 오셨구나'.
'6시 이후 담당이면 퇴근은 언제 하시는 거지. 여기가 24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오랜만에 세신을 해볼까 고민하던 사이 48번 손님을 외치며 하늘색 드로즈를 입은 아저씨가 들어온다. 군살 없는 몸매. 세신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말들로 친한 척을 한다. 정작 세신대에 누운 아저씨는 별 대꾸가 없었지만. 뭐라도 더 해보려 애쓰시는 모습은 리스펙.
[웹툰속 세신사들과 실제 세신사들이 유니폼이 같다. 강함이 느껴진다.]
목욕탕에서의 위계는 무엇으로 구별될까? 모두가 공평하게 벌거벗은 상태에서는 트렁크 팬티라도 한 장 걸친 사람들의 말에 힘이 실린다. "아저씨 물 좀 아껴 쓰세요. 그렇게 다 퍼내서 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요즘 물값이 얼마나 비싼데" 정도의 멘트를 할 수 있는 권력. 냉탕에서 하이톤의 웃음소리만큼 높은 물보라를 일으키는 꼬맹이들도 한 번에 제압하는 사자후.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가 욕탕으로 들어오는 순간, 무방비인 몸뚱이들의 시선은 한 점으로 집중된다. 시선의 독점. 밖에서의 갑옷이 무엇이었든 간에 목욕탕 안에서는 공평한 나체다. 교수와 학생, 사장과 손님, 형사와 도둑, 모두가 밖에서 얻은 피로와 오염을 풀어내는데 몰두할 뿐. 트렁크 팬티를 걸친 아저씨들은 풀어낼 것이라고는 없는 상태로 목욕탕 안을 당당하게 걸어 다닌다. 흐트러진 바가지를 정리하고 가득 찬 쓰레기통을 비운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은 데서 힘이 실리는 것일까. 존재의 희소성에서 힘이 생기는 것일까. 목욕탕에서 최고의 권력자는 문신맨도 노인도 아닌 바지를 입은 채로 목욕탕을 누비는 사람이다.
내게 무해한 목욕탕 아저씨가 관장하는 세상. 여기서는 아저씨를 제외한 모두가 평등하다는 느낌. 공간이 만들어내는 안온함이 좋다. 목욕탕을 애정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목욕의 세계엔 아직도 배울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