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만화책을 보고 요리를 배운 사람들이 각광받고 있다. 흑백요리사를 통해 다시 한번 클래스를 입증한 최강록 셰프, 같은 프로그램에서 '철냄비짱'을 레퍼런스로 한 요리를 만든 만찢남 조광효 셰프까지. 슬그머니 숟가락 하나. 나도 만화책을 보고 요리를 만든 적이 있다. '심야식당' 1권에 123쪽에 나오는 나폴리탄이라는 요리이다. 나폴리에서 온 이탈리아인에게 나폴리탄을 맛 보여주고 싶어 하는 순박한 마음과,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나폴리 사람의 마음이 잔잔하게 위로가 되었던 에피소드. '나폴리탄의 재료는 햄과 양파, 잘 나가는 가게에선 버섯, 그리고 꼭 피망이 들어갔죠'라는 만화 속의 지문으로는 모자라 구글링을 통해 토마토 케첩이 소스로 쓰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하고는 곧바로 마트로 가서 재료를 사고 주방을 어지럽히기 시작했었다. 30대 때만 해도 나는 머리와 손이 동시에 움직이는 사람이었구나 싶은 생각에 조금 허탈해지지만, 뭐 아무튼.
나폴리탄을 만드는 방법은 일반적인 파스타를 만드는 방법과 동일하다. 햄과 양파, 버섯과 피망을 길쭉길쭉하게 손질하고 파스타면을 소금을 넣은 물에 삶는다. 알단테 수준의 익힘 정도를 맞출 기량은 없음으로 그냥 7~8분. 올리브유에 햄과 채소들을 볶다가 소스와 파스타면을 넣고 2~3분 더 볶는다. 소스는 토마토소스를 넣어도 되지만, 미군들이 먹던 느낌을 살려 토마토 케첩으로. 면을 삶은 면수를 한 국자 부어가며 김이 날 때까지 볶다가 냉장고애 남은 파마산 치즈가루를 뿌려서 내면 끝이다. 소스가 케첩이라 딱 그 맛이 날 것 같지만, 의외로 새콤한 맛들은 조리과정에서 사라지고 달짝함이 깃든 꾸덕한 면과 아삭하게 씹히는 피망, 햄 특유의 맛이 잘 어울리는 요리가 된다. 술 마시다 잠깐 일어나 만들 만큼 간단한 요리.
[아무것도 아닌 요리를 툭 하고 만들어주면 맛있게 먹는다. 그걸 지켜보는것 만으로도 위로가 되던 만화 '심야식당']
10번째 마라톤을 위해 찾은 요코하마. 무심하게 근처 맛집을 찾다가 뉴그랜드 호텔의 '나폴리탄'이라는 메뉴를 발견했다. 심야식당 만화책에서도 원조로 언급되었던 바로 그 식당이라니. 10년의 시간을 건너 이국 땅에서 조우한 추억, 마라톤 전날의 카보로딩에도 딱 맞춤한 요리를 먹기 위해 3킬로미터의 거리를 두 시간에 걸쳐 천천히 걸었다. 이제 곧 100년을 앞둔 요코하마 뉴그랜드는 아직도 성업 중이었다. 우리의 목적지 'The cafe'에는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순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적지 않았고, 클래식한 분위기의 로비계단에서는 웨딩 사진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폴리탄의 원조 'the cafe'가 있는 요코하마 뉴 그랜드 호텔, 1927~]
30여분을 기다려 나폴리탄과 해산물 도리아를 주문했다. 둘 다 일본식으로 재해석된 서양요리. 이제는 또 다른오리지널이 아닐까. 원조를 맞이하는 감동의 순간. 같이 서빙된 파마산 치즈를 과하다 싶게 뿌리고 소스와 면을 비비며 섞는다. 숟가락과 포크로 면을 돌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가는데, 이번에도 욕심이 넘쳤는지 채 말아지지 못한 파스타면이 꼬리처럼 딸려 올라온다. 햄과 치즈와 토마토가 어우러진 꾸덕한 맛. 파프리카는 들어있지 않았다. 머릿속에 번개가 치고 추억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면 좋았겠지만. 당연하게도 익숙하게 아는 맛. 익숙함이 주는 안온한 기운이 뱃속 깊은 곳부터 채워져 갔다.
점점 위가 차오르면서 10년 전 궁금했던 그 맛이 이제야 완성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폴리탄'의 서사를따라잡은 느낌. 앞으로 맞이할 '나폴리탄'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태리와 일본과 한국을 넘나드는 브로드 한 음식으로, 수십 년의 세월이 쌓여 내 앞에 차려진 하나의 이야기로, 나의 시간 속에서 동기화되어 같이 진화하는 요리가 될 거라는 예감. 함께 익어갈 무언가가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