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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명 Nov 10. 2024

The end of the Haruki Journey

하루키를 읽다가 술집으로

그 유명한 와세다 대학 안에 하루키 박물관이 있었다. 그가 집필한 작품들이 모아져 있는 방이 있었는데, 방 가운데 에는 12명은 앉을만한 긴 책상이 있었고, 유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보이는 벽면에는 투명한 진열장이 설치되어 있었고 연대순으로 진열된 소설과 수필들이 가득했다. 반대쪽 벽면으로는 세계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책들이 꽂혀있었다. 그중에는 문학과사상사의 그림이 있는 에세이'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1997년에 발행된 좋은생각 느낌이 나는 책도 있었다. 몇 년째 대한민국의 중요한 트렌드 중의 하나였던 '소확행'의 기원이 하루키의 에세이였다는 사실. 그 옆으로 가면 하루키가 수집한 LP판들이 가득한 음악 감상실이 있었고, 듣기 좋은 Jazz가 커다란 JBL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푹신한 패브릭 소파에 앉아 가져간 책을 읽다가 잠시 졸았다. 하루키가 큐레이션 한 Jazz선율을 배경 삼아 꾸벅거리는 여행자라니. 계속해서 빈둥거리고 싶었지만.

[덕분에 와세다 대학 교정도 거닐어 보고, 하루키 아저씨 감사합니다!]

 젊은 시절 하루키가 즐겨 찾았다는 재즈바 DUG에 갔다. 대낮부터 문을 열고 있었고, 번화한 신주쿠에서도 대로변에 있어서 찾기 어렵진 않았다. 사연 많아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니 담배냄새 자욱한 바가 있었다. 흡연석에 앉을지 비흡연석에 앉을지 물어봤는데, 두 공간이 분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큰 차이는 없었다. 늦은 오후의 애매한 시간이었는데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하루키의 책으로 보이는 책을 펼쳐놓고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스피커 앞에 앉은 덕에 노래는 충분히 들을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jazz에는 조예가 부족했고, 담배냄새가 심해서 오래 앉아 있긴 힘들었다. 술은 하루키의 책에 자주 나오는 보드카 토닉과 블러드메리를 주문했다. 맛은 평이한 수준. 블러드 메리의 간을 직접 할 수 있도록 후추와 타바스코 소스를 같이 서빙해 주는 것은 특이했다. 이 정도의 시끌벅적함이라면,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될 수도 있겠다는 느낌. 바로 앞의 사람의 말도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웠다. 내 앞의 사람이 나에게만 집중하게 만들고 싶을 때. 그럴 때는 오히려 이런 곳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노쿠니야 서점 뒤쪽 지하에 있는

‘DUG'에 들어가 보드카 토닉을 두 잔씩 마셨다.


“난 가끔 여기에 와. 여긴 낮에 술을 마셔도

전혀 꺼림칙한 느낌이 들지 않아서.”


“이렇게 대낮부터 술을 마신다고?”


“가끔씩.” 하고 미도리는 글라스에 남은 얼음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었다.


“가끔씩 사는 게 고달파지면

여기 와서 보드카 토닉을 마시곤 해.”


-상실의 시대

[사진을 너무 못찍었군요.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담배냄새만 빼고]

다음날은 오모테산도에 bar radio에 갔다. 하루키의 에세이집에서도 언급된 곳. 만화 바텐더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비 오는 날이었는데 우산을 담을 수 있는 가죽 주머니가 입구에 비치되어 있었다.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플라스틱 양동이에 우르르 꽂아놓는 우산 꽂이보단 개별적을 케어받는 느낌이 좋았다. 먼저 온 손님은 없었다. 클래식한 분위기의 바를 통으로 빌린 듯한 기분. 오래되어 보이는 술병들과 적당하게 커팅되어 반짝이는 글라스들이 많았다. 술에 대해 좀 더 조예가 깊었다면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보였으리라. 두 명의 바텐더는 필요한 말과 필요한 동작 외에는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우리에겐 아무것도 관심 없는 듯했지만 필요한 타이밍에는 항상 앞에서 오더를 받고 있었다. 따로 부르거나 손을 들 필요도 없이 그저 고개를 들면 바텐더가 앞에 있었다. 술은 김렛과 마티니, 메뉴판에도 없던 올드 패션드까지 주문해서 적당히 취할 정도로 마셨다. 기본적인 칵테일들이지만 또 그만큼 차별화된 맛을 내기도 힘든 메뉴들. 처음 가는 바에 가면 꼭 시켜 먹어보는 것이 마티니와 올드패션드이다. 짜장면을 잘하는 중국집은 다른 요리도 맛있을 거라는 믿음. 그런 비슷한 이론이랄까. 라디오에서 맛본 칵테일은 훌륭했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셰이커를 흔드는 모습. 얼음과 술이 찰랑이며 섞이는 소리. 조용하지만 묵직한 객장의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섞여 기분 좋은 맛. 편안하게 대화하며 술잔 기울였던 기분 좋은 시간. 오래 남을 추억이 하나 더 생겼다.


한 해 하루키의 흔적들을 따라다니며 즐겁게 놀았다. 아직도 따라 하고 싶은 취향이라니. 수십 년 전의 그가 너무 대단해 보인다. 단단한 코어를 가진 사람. 내년에는 다른 도전들을 하며 놀겠지만. '본인만의 스타일로 꾸준히 인생을 살아낸다.'정도의 마음만은 계속 가져가고 싶다. 나만의 스타일로 꾸준히 달리고, 읽고 쓰는 삶. 25년도 기대가 된다.

[도쿄에 간다면 언제든 재방문의사 100%, 바텐더의 싸인까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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