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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세시 칼리 Dec 24. 2023

면접에서 합격할 수 있었던 그 이유는.

계약직 단시간 근로의 행복

20대 중반 처음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실연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 백담사로 템플스테이를 떠난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 정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훌훌 털고 다시 일상을 시작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아직 세상의 냉혹한 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나름 순수하던 20대의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성인이 된 이후로 대학 M.T나 친구들과 함께 당일치기 여행을 했던 것 외에 혼자 여행을 떠난 건 처음이었다.

혼자 조용히 나를 찾고 싶었던 건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템플스테이 안내 문구를 보고

덜컥 1박 2일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예약했다.



20대 중반, 여자 혼자 떠나는 여행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혼자 모텔에서 숙박하기에는 무서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택했던 템플스테이.

불교 집안에서 자란 나는 절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절에서의 숙박은 안전함이 보장되리라는 어린 마음에 나를 지킬 수 있는 장치를 장착한 여행이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백담사행 버스표를 끊고 버스에 올라타 4-5시간을 달려 백담사 근처에서 내렸다.

20여 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백담사까지 한참을 걸어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여름에 갔던 터라 백담사 앞에 있는 개천에서 발도 담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추억은 싸이월드

사진첩에서 꺼내볼 수 있다.


전국에 있는 여러 사찰의 체험 프로그램인 염주나 연등 만들기, 강정 만들기 체험을 하는 체험형 템플스테이와는 다르게 휴식형 템플스테이는 입소하여 잠시 스님께 절 내부 안내를 받고, 방 안에서 혼자 쉴 수 있는 일정의 템플스테이다. 물론 첫째 날 저녁과 둘째 날 아침은 제공되었기에 식사 걱정도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휴대폰 하나 들고 미리 교통편을 알아보고 미리 출력해 놓은 지도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어물어 도착한 백담사에서의 하룻밤의 기억은 나에게 아직도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도심에서 볼 수 없는 밤하늘의 빽빽이 들어찬 별들을 볼 때의 기분이란...

그렇게 나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다녀왔다.


20년이 흐른 지금,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아직도 진행 중인 것만 같다.

20대나 30대나 40대나 완성된 나는 없었다.

늘 미완성된 내가 살고 있다.






로펌 퇴사 후 실업급여를 다섯 달 받아 갈 무렵, 재취업에 성공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이었다. 새로운 직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세상엔 참 많은 직종의 일들이 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일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내가 새로 입사한 병원에도 많은 직종의 사람들이 일을 한다.

그런 큰 병원이 시스템을 갖추고 착착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때가 있었다.

환자가 진료 예약을 하고 방문해서 검사를 하고, 의사를 만나고, 약을 지어 병원 밖을 나가기까지 많은 직원들이 그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한다.


나는 하루 5시간 일하는 단시간 근로 계약직으로 입사를 했다.

계약직이니 계약이 만료되면 퇴사를 한다.

병원에서 오래 일 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할 계획이었고, 이사하기 전까지만 잠시 일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운이 좋게 집 근처 병원에 취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계약이 끝나도 계속 일하고픈 조건이었다.


한 달에 5시간씩 20일, 월 100시간만 채우면 월급이 나오는 단시간 근로.

와! 로펌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던 때를 생각하면 5시간 일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집에서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왜 사람들이 직주근접(직장과 주거지의 근접성),

직주근접을 외치는지 알 것 같았다. 출, 퇴근 시간이 짧아지니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마음가짐조차 달라졌다.

로펌에 다닐 땐 매일 시간에 쫓기고, 출근과 퇴근이 악몽 같았는데, 이렇게 여유롭게 일해도

월급이 나온다니 나에겐 소위 말하는 꿀직장이나 다름없었다.


9시에 출근, 1시간 점심 식사, 3시 퇴근.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렇게 바람직한 회사가

또 있으랴? 이런 직장이 많아지면, 출산율은 올라갈까?




한 달에 평일 20일만 일하면 되었는데, 달력을 보면 한 달에 평일이 23일인 날도 있고, 21일인 날도 있다.

그렇게 20일이 초과하는 날은 곧 쉬는 날이 되었다.

평일이 23일 있는 달은 평일 3일을 쉬면 된다.

이런 직장이 있다고! 다니면서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와 여행을 자주 다녔다.

평일에 갈 수 있으니 숙박도 비행기 티켓도 주말보다 저렴하게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 제일 좋았다.





병원의 다른 부서는 어떤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가 일하는 단시간 근로는 조건이 꽤 괜찮았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너무 힘들게 일을 해왔기에 상대적으로 편한 일이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정규직 직원들과 동일하게 병원 의료비 지원이 되었고, 복지 포인트도 지급되었다.

시급 또한 최저 임금보다 높았고, 근무 환경도 쾌적하고 어렵지 않은 일들이었다.








나는 병원 안의 혈액 기증과 관련된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혈액을 기증하면 기증된 혈액은 각종 검사를 하고 최종 보관 기준에 부합되면 냉동 보관된다.

냉동 보관된 혈액은 백혈병이나 혈액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나는 그곳에서 기증한 분들에게 전화해서 기증 후 건강에 관해 설문을 하고 명단 관리, 기증서 발부 등의 간단한 업무를 했다. 새로운 직종에 일하게 된 것이 재밌기도 하고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면접관으로 들어왔던 분과 같이 일을 하게 되었는데, 퇴사를 한 지금까지도 한 번씩 안부를 묻고 있다.


계약이 만료되고 퇴사를 하고 나서는 그분의 남편분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할 생각은 없냐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병원에서 일하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이 왜 나를 채용했는지를 말씀해 주셨는데,

의외의 답변이라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본인이 면접관으로 들어가 많은 지원자들을 만나고 같이 일도 해보았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 그만둔 직원도 있었고, 근무 환경이 단시간 근로여서 오히려 못 버티고 그만둔 직원도 있었다고 하셨다. 많은 자격증과 스펙이 우선이 아닌 지금 현재의 일을 함에 있어서 업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고, 같이 일하는 본인과도 잘 맞을 것 같은 지원자를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뽑았다 했다.


면접에 참여한 여러 지원자 중에 내가 이 일에 잘 맞을 것 같았다고 한다. 단시간 근로인 만큼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셨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본인이 회사 점심시간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위해 자신의 식사는 포기한 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20분 거리의 집까지 걸어가 하교 후 돌아올 아이들의 간식을 챙겨 놓고 다시 회사로 들어오는 워킹맘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내가 신경 쓰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의 직원을 채용하는 면접관들도 누군가의 아빠, 엄마이고 형, 누나, 언니일 수 있다는 점을,

이 각박한 사회에서 한 명의 구성원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해 보려 한 걸음 내디딘 나에게도 기회를 줘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분도 하셨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시작해 보기도 전에 미리 나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누군가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고 있다는, 응원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진심 어린 도전을 누군가는 알아볼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30대 후반에 재취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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