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직종에서 15년 일을 했다.
대학에 입학할 때 나는 그 당시 무슨 생각으로 전공을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영어를 좋아해서, 영어 선생님을 좋아해서 영어영문학과에 갈까 생각도 했었다.
왜 갑자기 법학과에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태몽 얘기를 해주셨던 것이
어찌 보면 법대를 들어간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 태몽이 "우리 집에서 여판사 난다 카더라."였다.
근거 없는 카더라에 법대 진학을 했다.
물론 신입생 때는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사법고시 패스하고 법조인으로 살아가리라
다짐도 했었다.
그런데 뭐 인생이 그렇게 뜻한 대로만 흘러가던가.
졸업 후 전공에 맞춰 대형 로펌에 입사를 했다.
나름 열심히 일을 하긴 했지만 그 회사 생활이
점점 나에겐 지옥처럼 느껴졌다.
처음엔 좋았다. 다닐만했다. 소송, 재판 관련 업무들이 재밌기도 했다.
실생활에 일어날 법한 법률문제들을 접하는 상황도 재밌었다. 배우는 것도 많았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육아휴직까지 쓰고 꽤 오랜 기간 직장에 머물러 있었다.
근무환경도 나쁘지 않았다.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딱히 없었다.
단지 시간의 압박이 있는 것 외에는.
로펌에서는 소송 업무를 하기 때문에 급박하게 제출해야 하는 서류들이 있다.
지금은 전자소송이 일반화되었지만, 전자 소송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법원에 직원이 직접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법원에 서류 제출만 하는 직원이 따로 있기도 했다.
물론 야간에 당직실에서 문건 접수를 받기도 하지만시일이 긴박한 재판인 경우, 서류를 다음 재판 전에
판사가 읽어 보아야 한다. 재판에 반영되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법원 근무 시간 내에 제출하려고 한다.
일단 의뢰인들이 서류를 늦게 제출하면 싫어한다.
그렇게 긴박한 서류가 나올 거란 걸 예상한 상황이 되면 직원들은 피가 마른다.
특히 나처럼 아이 하원, 하교를 책임지고 있는 직원들은 더더욱 그렇다.
서류가 늦게 나오거나 대기해야 할 상황이 되면 퇴근도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출 수 있겠다 싶은 시간에 문건이 나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하거나, 어린이집에 좀 늦는다고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법원 제출 문건이 나오면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 모아 서류를 만들고 법원에 가는 직원에게 넘긴다.
MC스퀘어 같은 집중력 향상 어플이라도 틀어놓고 싶어 진다.
눈에서는 레이저가 발사된다.
불변기간이라는 것을 지켜야 하는 것도 나에겐 큰 스트레스였다.
불변기간이란 민 ·형사소송법상의 항소기간 ·상고기간 ·즉시항고기간, 행정소송법상의 출소기간(出訴期間) 등이 이에 속한다. 판결이나 결정에 불복할 경우 고등법원, 대법원에 이의 할 수 있는 기한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불복할 수 없다.
물론 직원도, 파트너 변호사(Partner Lawyer)도,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도 챙긴다.
제출은 직원이 한다. 모든 구성원들이 챙겼어도 직원 실수로 제출이 안 되면 생각하기도 싫은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가끔 그 기간을 놓쳐서 의뢰인에게 손해배상 피소될 상황에 놓인 직원, 변호사를 본 적이 있다.
로펌에 일하는 동안 이 불변 기간만큼 무서운 건 없었다.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불변기간.
체크하고 또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연차가 오래될수록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이 내 일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감, 불변기간 등 시간을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을 오랜 기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시간 강박이 생겼다.
내가 처한 모든 상황들을 도저히 못 참겠던 날.
팀장님께 사직서를 내밀었다.
"팀장님, 저 그만두겠습니다."
팀장님은 의아한 얼굴로 왜 그만두냐 물으셨다.
그리곤 바로 회유에 들어갔다.
이만한 직장 없다. 여기서 정년까지 다녀라.
내가 별 반응이 없자 팀장님은 남편한테까지 전화를 하셨다.
남편 번호는 어찌 아셨는지 모르겠다.
남편한테 나 좀 잘 설득해 보라, 그만두지 않게 잘
말해보라 하셨다.
그렇게까지 잡는 팀장님의 모습에 넘어가서는 안 됐었다.
그때 그냥 그만뒀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몇 년의 시간이 참 아깝다.
<부의 통찰>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부아 c 님이 생각하는 가장 무서운 지옥은 견딜만한 지옥이라고 했다.
상황은 조금씩 나빠지고 있는데, '견딜 만큼만' 힘들어서 탈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곳이 견딜만한 지옥이라고 했다.
어쩌면 나에게도 회사 생활은 견딜만한 지옥이었을지도 모른다.
견디지 못할 만큼 힘든 지옥이었다면 팀장님의 퇴사 만류에도 내 의지를 꺾지 않고 강하게 사직서를 처리해 달라고 했을 것이다.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 거야.라는 생각을 하며 그 견딜만한 지옥에서 3년을 더 일했다.
하지만 나는 더 지쳐만 갔다.
빨리 탈출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과연 나에게 맞는 일이라는 게 있을까?'
'내 적성에 맞는 일은 뭘까?'
'회사 그만두면 무슨 일을 하지?'
그런 생각들을 하며 3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요즘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건 뭔지, 뭘 잘하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라고 한다.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대해 미리 생각해 보고 전공을 선택하고, 그 분야에 매진한다면
직장 생활을 하며 겪는 시행착오나 다시 진로나 적성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퇴사 후 나는 집 근처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의료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면접을 보고 며칠 후 걸려온 전화 한 통으로 내 삶이 이렇게 바뀌게 될 줄은 몰랐다.
나를 채용하는데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했다는 면접관 중 한 명과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이런 이유로 채용이 되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