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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 세시 칼리 Dec 31. 2023

퇴사하고도 뒤통수 맞을 수 있습니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퇴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봤었다. 그래서 그런지 퇴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큰 박스에 개인 물건들을 하나씩 담고 터덜터덜 걸어 나와 마지막으로 목에 건 사원증을 풀어 박스에 집어넣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회사 건물을 한 번 쓰윽 올려다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현실은 퇴사하는 날이 정해지면 후임자에게 업무 인수인계 해주고, 개인 물건은 미리미리 집에 갖다 놓는다. 무거운 짐은 택배로 부친다. 사실 뭐 챙길 물건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사무실내에서 발 아플 때 신던 슬리퍼, 다이어리, 차마 버리진 못하고 사무실에 남겨 둘 수도 없는 서류들, 뭐 그 정도.


씁쓸한 미소는커녕 나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회사에서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가는 지하철역까지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왔던 기억이 난다. 오랜 기간 몸 담았던 회사에서 나온 사실이 아쉽거나 미련이 남거나 하지도 않았다.

회사에는 함께 유럽 여행도 가고 30대 솔로 생활을 함께 누리며 좋은 일, 힘든 일 서로 나눈 동갑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가 아니면 회사에서 그렇게 오래 버텨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퇴사하고 나서도 언제든 연락하고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크게 아쉽진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따로 약속 잡고 회사 밖에서 만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1~2년에 한 두 번 만나긴 하지만 역시 자주 보진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퇴직금을 받고, 실업급여 수령만 원만하게 받았으면깔끔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던 나의 퇴사기.

그런데 역시 인생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더라.

퇴사 후 뒤통수를 세게 맞은 사건이 있었다.


육아휴직으로 1년을 쉬고 복직을 하니 친하게 지냈던 동료들도 비슷한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니

하나 둘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복직 시기가 맞지 않아 복직한 후에 함께 점심 먹는 멤버들이 바뀌었다.

시작은 그때부터였으리라.


그때부터 퇴사할 때까지 나름 잘 지냈던 회계팀 여직원이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3살 많았고, 딸 둘에 아들 하나를 키우는 회계팀 직원. 다른 직원들이 그 직원을 싫어했었는데 같이 점심 먹고 이야기 나누다 보니 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아서 그럭저럭 잘 지냈다.


서로 육아 정보도 나누고 워킹맘으로 겪어야 하는 고충들에 대해서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서

편하게 잘 지냈다.

나에게는 살갑게 잘 대해주어서, 사람들이 그녀를 왜 싫어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고

남들이 싫어한다고 나한테 잘해주는 그녀를 이유 없이 싫어할 이유는 없다 생각했다.


회계팀에서 직원들이 입사하거나 퇴사하면 4대 보험 가입이나 급여, 퇴직금 관련된 업무를 했었는데

퇴사 후 실업급여 관련 처리도 했기에 실업급여에 대해 물어보면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물론 주변 지인들에게 그만둘 때 실업급여는 잘 받을 수 있는지 확인 잘 해보고 나오라고 들었던지라 알아보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고용보험 홈페이지에서 구직급여 지급대상도 확인하고, 예상 수령 금액도 계산해 봤었다.






자발적 퇴사는 실업급여 수급대상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발적 퇴사는 수급 대상이 아니지만 늘 예외로 적용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고용노동법 시행규칙 제101조 2항 별표 2 수급자격이 제한되지 아니하는 정당한 이직사유 10항에 해당되었다.



당연히 <육아>로 인해 더 이상 업무를 계속하기 힘든 상황으로 퇴사하는 사유로 처리가 되는 거라 생각했다.

회사에도 그렇게 퇴사 사유를 말했었다.


퇴사 후 실업급여 신청을 해야 하기에  고용보험에 퇴사 신청이 되었는지 회계팀 직원에게 물어보니

대표 결재가 안 나왔다고 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아닌가?

기다려보라는 말만 일주일이 넘도록 하자,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이 여직원이 고의로 미루고 있는 듯했다. 결재가 그렇게 미뤄질 이유가 없었다.


며칠 뒤 실업급여 수령을 못하게 되었다는 메시지가왔다.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내 직감은 잘 맞는 편이라 나 스스로 놀랄 때가 많은데, 이번에도 내 직감이 맞았다.

갑자기 '뭐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표변호사가 앞으로 자발적 퇴사는 실업급여수령이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로펌이니 법률적으로 위반되는 사항은 당연히 해서는 안 되는 거 잘 안다.

그런데 나는 육아로 인한 퇴사였다. 대표변호사는 내가 어떤 사유로 퇴사하는지 알리가 없다.

결재 서류만 보고 처리할 것이 분명하다. 결재를 어떻게 올렸기에!


설령 그런 결재가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 직원은 이러이러해서 퇴사하는 거니 실업급여 대상자다.'

말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나에게 미리 연락은 해줄 수 있었을 일이다.

회계팀 여직원이 퇴사 전에 그렇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니, 내 뒤통수를 그렇게 세게 칠 줄은 몰랐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퍽 온순한 편이지만,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참지 못하는 편이라

남편이 말하기를 코뿔소 같은 여자라고 했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나는 퇴사한 회사를 다시 찾아갔다. 누가 퇴사한 회사에 다시 가고 싶겠는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알고 싶었다.




실업급여로 받을 수 있는 돈이 한 두 푼도 아니고, 게다가 내가 회사 생활하면서 고용보험으로 낸 세금이얼마며,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받기 위해 냈던 세금 아닌가.

어찌 되었든 나는 이제 백수 아닌가.


몇 달 다시 구직활동을 하는 기간 동안 받는 실업급여는 확실히 없는 것보단 생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다.

회사에 가니 대표변호사가 있어서 만날 수 있었다. 상황을 얘기하니 대표는 그 사실은 몰랐다며

바로 회계팀에 전화해서 처리해 주라고 했다.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 퇴사 날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무리 자발적으로 나온 회사지만 15년 이상 몸담고 있던 회사였는데 실업급여 때문에 이렇게 다시 와서 그 자리에 서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표변호사실에서 나오니 직원들이 위로해 주었다. 위로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말 한마디가 참 고맙게 느껴졌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 여자가 못된 거라고.


집에 오는 길에 회계팀 직원에게 왜 그렇게 결재를 올린 거냐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주민등록등본을 보내라는 둥 이상한 헛소리를 하길래, 그냥 <육아>로 인한 퇴사로

처리하면 다른 서류는 필요 없다고 나한테 왜 이런 거냐고 따져 물어보니 별 말이 없었다.


더 이상 싸우기도, 대꾸하기 싫어서 문자는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봤다.

그 여자는 나한테 왜 그런 걸까?

내가 모르던 그 여자를 다들 싫어하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렇게 뒤에서 남의 뒤통수를 쳐서 그런 걸까?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 내며 퇴사를 해서 그게 꼴 보기 싫었던 걸까?

내가 그 여자에게 뭐 잘못한 게 있었던 건가?

같이 지낼 땐 자기 필요에 의해 잘해주다가, 퇴사하고 나가는 내가 아니꼽게 느껴졌을까?




아직도 정확히 그 여자가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내 평생 처음으로 뒤통수 한 번 세게  맞았던 사건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퇴사할 때 실업급여는 꼭꼭 수령 확인을 제대로,

확실히 해놓아야 한다는 걸.

그리고 언제나 내 권리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걸.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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