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산’을 만났다. ‘산’은 오래도록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미워할 이유를 매번 찾아내는 듯했지만 그 너머에는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싶은 그녀의 발버둥이 있었다. 그것이 늘 안쓰러웠다.
그녀의 아버지 ‘김영철’씨의 삶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그의 삶을 생애 주기와 역할에 따라 살펴보니, 그녀는 김영철 씨의 전체 삶 중에 10%도 본 적이 없다. 김영철 씨의 30대부터 함께 했지만 ‘아버지’라는 역할만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의 아픔과 상처를 그녀는 가 닿을 길이 없다. 10~20대의 좌절과 방황, 30~40대의 번뇌와 고단함, 50~60대의 고독과 공허함을. ‘김영철'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이 생을 경험하기로 한 존재를 그녀는 자신의 머릿속 세상에서 판단하고, 비난하고 있었다. 그녀는 김영철 씨를 모른다. 어떻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세상에 나가서 100중에 10만큼 알면서 안다고 우기면 비난받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 가족을 안다고 말한다. 이야기를 나누며 김영철 씨의 삶이 객관화될수록 우리는 점점 더 먹먹해졌다. 나는 과연 내가 아닌 상대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세상에 단 한 명도 알 수가 없다. 안다고 생각할 뿐. 그것은 내 부모이고 내 가족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수 있다. 아니 그것은 세상 모든 존재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고 무섭죠?’ '산'이 고개를 끄덕인다.
'청년 김영철 씨도 사는 게 무서웠나 봐요...'
'산'의 눈이 토끼눈처럼 커지더니, 커다랗고 아름다운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닫아 두었던 댐의 문을 열면 한순간에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처럼 그녀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서울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울먹이며 '산'이 말했다.
‘아버지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니라 김영철 씨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무섭고 두려워서 후회할 줄 알면서도 원치 않는 행동을 했던 어린 날의 나처럼…’
얼핏 외로울 수 있겠다, 생각은 했으리라.. 허나 미움과 원망 덕분에 그런 생각은 급류에 쓸려가듯 찰나 지간 사라져 버리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그녀 삶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다. 그 미움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이 느껴졌다. 그녀는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이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문득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방으로 뛰어들어와 자신을 안고 병원에 달려갔던 장면을 기억해냈다. 사랑받았던 기억이 오랜 먼지를 털고 세상에 나왔다. 좋았던 기억은 물 흐르듯 흔적 없이 흘러가버린다. 우리는 아프고 서럽고 상처받았다고 생각하는 장면들만 돌에 새겨 넣듯 가슴 깊이 새겨 넣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사랑이 참 어렵네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말속에 담겨있는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말에 속지 말아야지, 다짐해본다. 그 어떤 말을 하든, 이미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그녀의 가슴속에 오랫동안 숨겨 있던 사랑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김영철 씨를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
햇살 좋은 날이다. 카페에서 나오는 길, 살포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다 큰 어른들이 뭔 손을 잡고 걷느냐고, 누군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