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드’를 좋아한다고 내세우고 있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중국드라마 중에서도 고장극이다. 현대극은 거의 보지 않는다. 어쩜 이토록 취향이 확고한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다. 중국어를 공부하려고 해도 현대극은 봐야 하고, 중국 드라마의 인기를 봐도 현대극을 볼 만도 한데, 현대극이라고는 <아, 희환니> 한 편 밖에 보지 못했다. 조만간 류츠신 원작의 <삼체>를 볼 계획은 있으니 인심쓰듯 두 편이라고 말해도, 셀 수도 없이 본 고장극에 비하자면 한참 모자란다. ‘중드 취향’이 아니라 ‘중드 편향’이라고 글의 제목부터 바꿔야 하나?식습관을 비롯한 생활적인 부분이나 다른 취향에는 열려있는 사람인데 중드 취향에는 유독 편향이 심해진다. 하지만 취향은 편향을 전제로 발생한다. 애초에 편향이 없다면 취향도 없다. 그러니 편향된 취향은 당연한 거다. 다만 중드에 대해서는 고장극 편향을 더욱 고집하게 된다는 점이 다른 부분들과 다르다. 가령, 책은 고루 읽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중드는 고장극만 찾는다.
그건 중드 키즈로 자란 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무협물에 많이 노출되어 챙챙챙챙 칼싸움을 하고, 장풍을 쏘고, 주화입마를 당하는 장면에 익숙해서 그런지 어른이 되어서도 고장극에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이래서 조기 교육이 중요한 걸까? 중드 고장극을 보지 않는 사람 중에는 고장극의 설정이 말도 되지 않는다며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칼을 타고 하늘을 나는 도사들의 수련 과정이나 몇 번씩 환생하고 겁을 맞는 것도 말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본다. 물론 사람들이 귀 옆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릴 것 같아 입밖에 내진 않지만 말이다. 물활론을 오래 믿는 것도 중드 탓일까?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일상 생활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기에 가상의 세계에서나마 마음껏 벗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유한하고, 하나의 삶만 살아가기엔,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으니까. 그러니 이런 숨구멍 하나쯤은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누군가에겐 그 가상의 세계가 게임 세계이고, 케이팝이듯, 나에겐 그것이 고장극일 뿐이다.
고장극은 우리나라에서는 사극이라고 불리는 장르이다. 고장극 안에서는 따로 편애하는 장르는 없어 무협 뿐만 아니라 시대물, 선협물도 좋아한다. 무협물이건 시대물이건 장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현재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는 게 중요하므로 고장극 전부를 좋아한다. ‘지금 여기’를 반영하는 드라마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화제가 될 지라도 내가 모두 건너뛰는 건 내가 ‘지금 여기’의 우리를 그다지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이리라. 현실도피처럼 들리겠지만 변명을 하자면, 평소에 남들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 삶이 피곤한 터에 간접 체험까지 극현실주의로 하고 싶지는 않다. 꿈을 꾸듯 드라마나 영화를 소비하고 싶다. 이것이 자칫 개인을 우매하게 만드는 큰 그림 안에 들어가는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지금 여기 우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회 현상을 다룬 책이나 과학책을 챙겨 읽는다. 소설도 대체로 현실적인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다룬 작품을 선호한다. 장 자크 상페가 말했 듯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니까 언제 어디서 무엇을 보건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검을 타고 비행을 하려고 해도 균형감각이 없으면 검에서 떨어지고, 멀리 보지 않고 눈앞만 보면 흔들리게 되니 말이다. 먹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처럼 고장극에 넋을 놓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현실을 말하는 책을 읽는다. 확고한 하나의 취향을 지키고자 다른 취향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취향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