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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Jul 21. 2023

‘가위손’ 보다는 ‘가유희사’를 더 쳐주는 집

    

단칸방에 가까운 집에서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지지고 볶으면서 살았으니 어느 모로 보나 형편이 좋았던 집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얼리어답터였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집에는 비디오비전(TV와 비디오플레이어의 일체형 가전제품)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분에 넘치는 가전이었다. 그 덕분에 학교에서 “집에 TV 있는 사람?”, “집에 비디오 있는 사람?” 손들라고 했을 때 당당하게 두 번이나 들 수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왜 우리집이 가난을 면치 못했는지 납득이 되는 지점이다. 그나저나 집에 TV부터 냉장고, 자동차까지 손을 들고 조사를 시키다니 그 시절의 미개함은 지금 생각하면 소름 끼칠 정도로 끔찍하다. 하지만 그땐 내가 손을 여러 번 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뿐이었지 시절의 미개함은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그저 우리 집에 TV도 있고 비디오도 있어서 기뻤고 아주 잠깐 손을 거의 들지 못하는 친구에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비디오비전이 없었더라면 그게 나 일 수 있었으니까. 비디오비전 덕분에 수치도 면하고 낭만도 얻었다. 매일 매일 비디오테이프와 보내다니 그건 요즘 IPTV 컨텐츠를 매일 유료로 구매하는 것과 같은데 ‘아버지 어쩌자고 그런 낭비를 하셨단 말입니까?’ 분명 분수에 맞지 않았지만 덕분에 중드키즈가 될 수 있었다. 가난은 싫었지만 낭만이 없었다면 마음마저 가난해졌을 것이다. 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행동은 이후로도 셀 수 없이 많지만 이것만큼은 고맙게 여기는 부분이다.


그런 비디오비전을 놀게 할 수는 없는 일! 동네 비디오 가게 문턱이 닳도록 비디오를 많이 빌려봤다. 그 시절 동네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꽤나 넓은 규모로 여러 곳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과 도서 대여점, 음반 가게가 호황인 시절이었다. 우리집에서 빌려본 비디오 테이프의 9할은 중국 무협 시리즈물과 홍콩 영화였다. 대여는 주로 아버지의 특권인지라 그의 취향은 고스란히 우리의 취향이 되었고, 비디오테이프가 집을 드나들 때마다 내 마음 속 중드의 방은 평수를 넓혀갔다. 그러다 어느새 날마다 중드에 빠져 사는 중드 키즈가 되었다. 그러니 당시 내 장래 희망이 ‘비디오가게 주인’이었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들과 안면을 트고 나답지 않게 싹싹하고 공손하게 눈도장을 찍곤 했다. 지금 도서관을 둘러보듯 비디오 대여점에 가면 한참을 머물다 왔다. 가게 사장님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곤 했다. 내눈에 그들은 TV에 나오는 대기업 회장님들보다 더 큰 존재였다. 말만 하면 척하고 비디오를 뽑아오는 솜씨라니! 고수로다! 고수!


<초류향>, <무측천>, <의천도룡기>와 같이 유명한 것들부터 내용도 제목도 비슷비슷하여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비디오테이프들이 끊임없이 집에 들어오고 나갔다. 온 가족이 함께 깔깔거리며 보기도 했지만 음과 양을 합하여 독을 없애거나 주화입마를 푸는 장면들에서 우리는 각자 다른 방향을 보며 TV 화면은 보지 않는 상태로 잠시 침묵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아마 우리집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성교육 자료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는 대부분 무협 시리즈를 빌려오고 그 사이사이 우리가 용돈을 모아 유명한 영화를 빌려봤다. 그전까진 궁금해하지 않았던 명절 용돈의 행방이 궁금해진 때도 그때였다. 돈이 있어야 비디오테이프를 빌릴 수 있는데 주머니엔 언제나 천 원짜리 한 장 있기가 어려웠다. 요즘 우리 아들 지갑을 보면 현금이 두둑하던데 그 돈을 오직 마라탕 사먹는 데에만 쓰다니 내 기준에서 보면 아깝기 그지없다. 그래, 내가 중드를 파듯 너도 마라탕을 파는 걸 지도 모르지!


주머니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신중을 기해 대여점을 기웃거리던 어느 때,  영화 <가위손>이 유행이었다. 그날은 주머니 사정이 좋아 동생한테 아이스크림값 하나 붙여선 비디오 대여점으로 홍콩 영화 <가유희사>를 빌려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는데 헐리우드 영화 <가위손>을 들고 왔다. 아이스크림값도 못한 동생에게 분통이 터졌지만 동생의 변명을 들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동생이 몇 번을 <가유희사>라고 말해도 아주머니가 극구 <가위손>을 주더란다. 초등학생이 제목도 모르고 심부름을 온 모양이라고 짐작하곤 인기많은 <가위손>을 빌려준 것이다. 아주머니, 우리는 그 취향이 아니란 말입니다! 교환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가위손>을 봤고 아름답고 동화같은 이야기는 분명 매혹적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구설수에도 조니 뎁의 좋은 면을 보려 했던 유일한 까닭은 이날 본 가위손의 모습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취향이 아니니까 없는 돈 박박 긁어모아 이내 다시 대여점에 가서 제대로 <가유희사>를 빌려 봤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본 척’ 하기에는 <가위손>이 더 나았지만 용돈은 바닥내서라도 내가 꼭 봐야하는 작품은 <가유희사>였다. 우리는 <가위손>보다 <가유희사>를 더 ‘쳐주는’ 집이니까.


서울에선 '헐리우드 키즈'라는 말이 돌았던 모양인데 영화관 하나 없는 마을에선 주말의 명화가 아니라면 헐리우드 작품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집은 아버지께서 빌려오신 무협물 물량 공세에 주말의 명화도 제때 챙겨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때 우리집 최고 인기 배우는 조니 뎁도 탐 크루즈도 아닌 <초류향>의 정소추였다. 그렇게 중국 무협 시리즈물에 매료되어 살았고 홍콩 느와르 한 편에 휴지 한 통을 다 적시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 감수성의 3할은 유전이요, 나머지 7할은 어릴 적 본 홍콩 느와르가 길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감수성을 말하자니 앞에 말한 동생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 생각난다. <천장지구>를 보고 있을 때였다. 휴지를 한 통 다 써가며 울고 있는데 옆에서 보던 동생이 그런 내가 딱했는지 한심했는지 “저거 다 연출이다. 저 사람들 주변에 카메라맨 감독님 다 서 있다. 울지 마라.”며 달래줬다. 제 딴엔 위로를 건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악다구니를 써가며 “네가 뭘 아냐? 이 감정없는 가시나야!”라고 되받아쳤다. 동생은 <전설의 고향>이나 <여곡성>을 보고도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는 아이었다. 같은 집에서 같은 미디어를 보고 자랐는데도 어쩌면 이렇게 달랐을까? 드라마 한 편을 보면 몇날며칠을 곱씹는 나와 달리 뒤돌아서면 현실로 돌아오는 포스라니! 문득 궁금하다. 동생은 몇 살까지 중드를 봤을까? 나는 지금도 중드에 빠져 <오징어 게임>도 안 보고 40년 가까이 드라마라곤 중드만 보는데 내 동생은 지금까지 중드만 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한참을 어이없어 웃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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