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최고 인기 배우였던 정사오추(정소추)가 미남인 것은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소녀 감성을 자극할 청춘은 아니었던지라 나는 <의천도룡기>의 장무기였던 량차오웨이(양조위)에 푹 빠져버렸다. 내 인터넷 아이디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아이디의 영문자는 그(T)와 나(L)의 첫 이니셜을 합친 것(중학생 때라 first name, family name을 구분하지 못해 그는 first name의 첫 자인 T를, 나는 family name의 첫 자인 L을 합친 요상한 아이디가 되어버렸지만)이요, 93은 내가 그의 평생 팬이 되기로 작정한 해이다.
1986년판 <의천도룡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두 번 더 봤는데 20년이 지나 다시 보니 장무기 뿐만 아니라 주지약, 조민 등을 맡은 여배우들의 아름다움도 큰몫을 하는 영화였다. 그래서 지금껏 많은 <의천도룡기>가 만들어졌지만 이 작품을 능가하지 못한다고 하는 모양이다. 장난기 어리고 어리숙한 모습의 량차오웨이가 얼마나 그윽하고 깊은 눈매를 가지고 있는지 당시 4대 천왕(유덕화, 여명, 장학우, 곽부성)이나 장궈룽(장국영)에 빠져있던 친구들은 알지 못했다. 서울도 아니고 경상북도의 한 중소도시에서 량차오웨이를 거론하면 개콘의 윤형빈이 "누구?"라고 되묻는 듯한 반응이 따라왔다. 그래, 너희들은 중드 키즈가 아니지? 니들은 4대 천왕만 겨우 아는 중드 신생아들이지? 마치 량차오웨이에 대한 소유권을 나만 가진 듯 은근히 뿌듯했다.
10대 아들 때문에 사춘기에 대해 내가 사춘기였던 시절보다 훨씬 많은 공부를 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보다 '내 아들은 누구인가?'가 더 절박한 질문이라는 듯이. 그래서 이런저런 책들을 읽어본 결과 사춘기 아이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는 것이 두려운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 같아 보이는 것이 두려운 유형인데 아들은 전자이고 나는 후자였다. 그래서 아들은 친구들이 흰 티를 입으면 주구장창 흰 티만 사고, 친구들이 슬리퍼를 신으면 주구장창 슬리퍼만 신고 다닌다. 그와 달리 나는 다른 친구들이 사대천왕에 흥분할 때 혼자 량차오웨이를 사모하며 우월감을 느낀 것이다. '니들은 량차오웨이의 눈빛을 모르는구나?' 이런 마음. 유치하기는 아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때 내가 량차오웨이를 알고 있고 좋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내가 처음 흠모할 때와 달리 량차오웨이는 왕자웨이(왕가위)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 인기가 드높아져 소백산 자락까지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나오는 병이 “내가 키웠다.”병인데 량차오웨이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그런 마음을 오래 품었었다. 량차오웨이의 음반을 갖고 있는 이도 사방 백리엔 나밖에 없었으니 주변 사람들은 나의 안목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기가 높아지면 거리는 멀어지는 법, 내가 좋아하던 중드에서는 더 이상 량차오웨이를 만나기 어려웠다. 그래도 1990년대초 우리 동네에서 량차오웨이는 비경쟁 영역인지라 주변에서도 ‘량차오웨이 마누라’ 지위를 아무도 탐내지 않았는데 왕가위의 뮤즈로 재탄생한 그에 대해선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이후 그에 대한 소유권을 상실하였지만 량차오웨이 덕분에 지금껏 중드 취향으로 살고 있으니 그를 대하는 내 마음은 얼마간은 종교적이다. 량차오웨이를 믿습니까? 믿습니다!
중드에서든 영화에서든 량차오웨이는 멀어졌고, 어느 순간 느와르의 인기도 식고 무협물에서도 어설픈 CG가 난무해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집 비디오비전의 수명이 다했다. TV는 새로 샀지만 비디오는 다시 사지 않았던 걸까?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져 비디오를 빌릴 수 없어진 걸까? 아니면 중국 드라마와 영화가 재미가 없어진 걸까? 동네 비디오 가게가 망한 걸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아마 모두 이유가 되었으리라. 더 이상 우리집에서 비디오 대여점의 검은 봉다리가 드나들지 않았다. 우리집만이 아니라 어느 순간 중국 무협물은 쇠락하고 있었다. CG 탓도 분명 있었다고 본다. 컴퓨터 그래픽이 도입되는 시기라 그 어색함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보다 보면 자꾸 흐름이 끊어졌다. 배는 움직이는데 강물은 움직임이 없는 누가 봐도 합성이 분명한, 그러나 합성이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던 시절이 차라리 그리웠다. 곽부성 주연의 영화 <풍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작품을 기점으로 한동안 중화권 드라마나 영화를 멀리했다. 그런 쪽이 아닌 왕가위의 영화만 간간이 보곤 했다. 그곳엔 량차오웨이가 있었으니까.
가슴에 허세가 차오르는 나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량차오웨이를 제외한 다른 중화권 배우들이 내 마음속에서 모조리 사라질 무렵 나는 졸면서도 '프랑스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어설픈 발음으로 '一天一點愛戀'을 따라부르던 아이는 불어의 발음에 매혹되었다. <라빠르망>에서 만난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이 주던 자극성은 미디어 관련 뇌를 초기화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중드는 인물 관계도가 복잡한 반면 메시지는 단순하고, 프랑스 영화는 인물은 두셋만 나오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너무 어려웠다. 그런데 20대엔 그게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중드 키즈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대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려운 프랑스 영화를 보았다. 내 진짜 사춘기는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평탄하게 중드를 보던 일상이 일그러지며 불란서 영화로 ‘있어 보이려’한 시기, 딱 요즘 집에서 자주 보는 사춘기의 모습일세! 이를 일컬어 나는 ‘중드 공백기’라고 부른다. 작은 자취방에서 중드를 소비하며 지내기엔 나의 용돈은 넉넉하지 않았고, 그 용돈을 그런 곳에 쓸 만큼 철이 없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중드 쇠락과 맞물려 찾아온 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20대를 넘기고 30대도 반이 지날 무렵 다시 중드를 보기 시작했다. 15년 가까이를 잊고 지낸 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공백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스무살에서 바로 마흔이 된 것 같다. 그 사이 나는 무엇을 사랑했을까? 내내 좋아하던 것을 잊고 살 만큼 강력한 대상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20대엔 뼈마디가 아파올 정도로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한다. 사랑의 결실을 키우느라 30대를 보내며 다시 중드를 만났다. 아주 우연히.